[고대사] 한강-임진강유역 고구려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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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대사] 한강-임진강유역 고구려요새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분포와 규모
Ⅲ. 구조와 기능
Ⅳ. 고구려의 남진과 고구려요새
Ⅴ. 맺음
본문내용
Ⅰ. 머리말

한강 북안에서 임진강에 이르는 지역은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서해로의 진출이 용이하여, 이러한 자연지리적 환경은 선사시대 이래로 생산과 교역 및 정치․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할 수 있게 하였다.
특히 삼국시대에 접어들면서 삼국은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하여 각축을 벌이게 되는데, 삼국 중 이 지역을 가장 먼저 차지한 것은 백제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18년 고구려에서 남하한 온조집단이 한강유역에 정착한 이후, 475년 웅진으로 천도할 때까지 이 지역은 백제의 영역이었다. 그 후 고구려의 남진정책(南進政策)으로 475년에는 고구려의 영역에 들어가게 되어 나제 연합군이 재탈환하게 되는 551년까지 이 지역은 고구려의 관할 하에 있었다. 이에 대한 이견이 제시되었는데, 《삼국사기》의 내용 중 장수왕이 한성함락 후 철수하였다는 기록과 웅진천도 이후 한성경영 기록 및 삼국사기 지리지의 안장왕과 한씨 미녀 관련기사 등을 근거로 하여, 475년 웅진천도 이후에도 한강유역은 백제에 의하여 관리되어 왔으며, 고구려는 안장왕 11년(529)이후에야 비로소 한강유역을 장악하였다가 551년 나제연합군에 의하여 한강유역을 상실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고구려의 한강유역 점유기간은 종래의 76년에서 22년으로 줄어들게 된다.
김영관, 〈삼국쟁패기 아단성의 위치와 영유권〉,《고구려연구》5, 학연문화사, 1998, 107~128쪽
김영관, 〈백제의 웅진천도 배경과 한성경영〉, 《충북사학》 11․12, 충북대 사학회, 2000, 63~91쪽
백제는 551년 한강하류지역을 수복하였으나 2년 후 신라의 공격으로 이 지역을 빼앗기게 되고 삼국통일전쟁을 통하여 완전히 신라의 영역에 포함되었다.
경기북부지역에서 고구려유적이 조사되고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인데, 남한지역에서 고구려유적에 대한 최초의 발굴조사는 1977년에 실시된 구의동유적(九宜洞遺蹟)이다. 조사 결과 수 백여 점의 고구려토기와 철제품이 출토되었으나 조사단은 이 유적을 고구려 군사유적이 아닌 백제의 고분으로 추정하였다. 이후 구의동유적은 거의 20여 년 동안 백제유적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 후 성내에서는 백제토기와는 이질적인 토기가 다량으로 출토되어 보고자는 그것이 구의동유적 출토유물과 함께 고구려토기라는 견해를 제기하였다 김원룡․임효재․박순발, 《몽촌토성-동북지구 발굴조사보고서》, 서울대학교박물관, 1988
《한강유역의 고구려요새-구의동유적발굴조사 종합보고서》, 구의동보고서 간행위원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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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시작으로 아차산(峨嵯山) 일대와 연천군 일대의 호로고루(瓠蘆古壘)와 당포성(當浦城), 은대리성(隱垈里城), 양주군, 파주시 등지에서 고구려유적이 확인되어 《경기도 연천군 군사유적 지표조사보고서》,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1995
남한지역에 많은 고구려유적이 분포하고 있음이 입증되었다. 이들 지역에서는 고구려의 기와편과 군량미창고, 탄화미,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그 중 아차산4보루와 시루봉에서는 수 백여 점의 고구려토기가 출토되었으며, 성벽과 치(雉) 치, 또는 치성이라고도 한다. 성곽의 요소에 성벽을 돌출시켜 전방의 좌우방향에서 접근하는 적과 성벽에 붙은 적들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요새로 凸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이름인 치(雉: 꿩)는 제 몸을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한다는 뜻을 딴 것이라 한다.

, 온돌과 집수시설을 갖춘 고구려 관방시설의 구조가 확인되었다. 임효재․최종택․양성혁․윤상덕․장은정, 《아차산 제4보루-발굴조사 종합보고서》, 서울대 박물관, 2000
〈시루봉 보루유적 발굴조사 약보고〉, 서울대발굴조사단, 1999
또한 연천 호로고루에서는 지상구조물인 동벽은 체성벽과 치를 갖춘 고구려성벽 바깥쪽에 신라성벽이 다시 구축되어 있음이 확인되었으며, 수 만점에 달하는 고구려기와가 출토되어 고구려기와 연구에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하게 되었다. 〈연천 호로고루 발굴조사 약보고서〉,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2000
심광주, 〈연천 호로고루〉, 《44회 전국역사학대회 고고학부 발표자료집》, 한국고고학회 2001, 85~102쪽

이러한 자료를 토대로 이 글에서는 경기북부지역의 고구려 유적의 분포 이 글에서는 각 유적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자세한 내용은 참고문헌 및 논문 참고 바람.
, 구조와 기능을 살핀 뒤 고구려의 남진정책과 한강-임진강 유역의 고구려 관련유적의 관련성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참고문헌
고구려연구회 편, 《고구려산성연구》, 학연문화사, 1999
신형식 편, 《고구려산성과 해양방어체제연구》, 백산자료원, 2000
공석구, 《고구려영역확장사(高句麗領域擴張史硏究)》, 서경문화사, 1998
김부식, 고전연구실 옮김, 《삼국사기 상》, 신서원, 2000
서울대학교 박물관, 《특별전, 고구려》, 통천문화사, 2000
박성봉, , 《광개토태왕과 고구려 남진정책》, 학연문화사, 2002
심광주, 〈남한지역의 고구려유적〉, 7회 국제학술대회 발표논문, 2001
최종택, 〈고고학상으로 본 고구려의 한강유역진출과 백제〉, 《백제연구》28집, 충남대백제연구소, 1998
최종택, 〈경기북부지역의 고구려 관방체계〉, 《고구려산성연구》, 학연문화사, 1999
http://www.jangan.ac.kr/gonggi/hwasung/chi.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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