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학] 청계천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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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생태학] 청계천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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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관
1) 청계천 역사
2) 청계천 발원지
3) 청계선 유역
4) 청계천 시설

2. 수질
1) 조사지역
2) 공사기간 중의 수질변화

3. 생태
1) 조사지점
2) 식물
3) 동물
4) 부착조류

4. 인간의 영향
1) 청계천 개발계획
2) 다른 도시하천의 예

5. 현재의 청계천
6. 참고문헌

별첨
본문내용
1. 개관
1) 청계천의 역사
(1) 조선시대의 청계천
서울이 조선의 수도로 정해지기 전 청계천은 자연상태의 하천이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서울의 지리적 특성상 상대적으로 지대가 낮은 도성 한가운데로 물길이 모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조선왕조가 도성 안에 있는 수로를 정비하기 전에 이미 자연스럽게 물길이 형성되어 있었다. 서울의 기후는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봄·가을에는 건조하고 여름에는 고온다습 하였다. 따라서 청계천은 비가 적은 봄, 가을은 대부분 말라있는 건천 (乾川)이었던 반면,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철 우기에는 조금만 비가 와도 물이 넘쳐 홍수가 날 정도로 건기, 우기에 따라 유량의 변화가 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넘치면 가옥이 침수되거나 다리가 유실되고 익사자가 발생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이를 해결하기위해 조선 태종때 처음으로 '개천도감(開渠都監)'를 설치하고, 다음 해인 1412년(태종12) 1월 15일부터 2월 15일까지 모두 52,800명의 인부를 투입하여 대대적인 공사를 실시하였다.

(2) 조선시대 청계천의 가치를 둘러싼 논쟁
청계천의 성격을 두고 풍수학상의 명당수로서 늘 깨끗하게 유지해야한다는 명분론적 주장과 도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어 더러운 것이 많이 생기므로 이것을 배출할 하천이 있어야 한다는 현실적 주장이 맞서고 있었다. 이 논쟁에서 세종이 후자의 주장을 받아들임으로써 청계천은 생활하천으로 결정되었다. 이로써 청계천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도성에서 배출되는 많은 생활쓰레기를 씻어내는 하수도로서 기능을 함으로써 도성 전체를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3) 일제시대의 청계천
일본이 청계천을 정비하기 시작한 것은 1918년경부터였으며, 그것도 서울에서 청계천이 가지는 상징성이나 보건, 위생 등 서울사람들의 생활에 있어서 중요성을 인식한 때문이 아니라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조선 식민지배의 중추기관을 청계천 이북으로 이전하기 위한 사전 정비작업의 하나로 시작되었다.
일본은 1926년에 청계천을 복개하여 1만평의 택지를 조성하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 계획은 광통교에서 주교정(舟橋町)까지를 철근 콘크리트로 덮어서 1만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이 곳에 택지와 상가, 위락시설을 조성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계획들은 재정문제로 인하여 구상에 그치고 말았으며, 실제 복개가 이루어진 것은 1937년 태평로에서 무교동 구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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