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시가] 이황, 이이와 그들의 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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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전시가] 이황, 이이와 그들의 시조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이황과 이이의 생애와 작품 분석
1. 퇴계 이황과
1) 생애
2) 의 창작배경
3) 작품 분석과 이해
4) 의 특징
5) 문학사적 의의
2. 율곡 이이와
1) 생애
2) 의 창작배경
3) 작품 분석과 이해
4) 의 특징
5) 문학사적 의의
Ⅲ. 도산십이곡과 고산구곡가의 후대적 수용
1. 형식적인 측면
2. 내용적인 측면
3. 미술계의 수용
Ⅳ. 결론


본문내용
5) 문학사적 의의

퇴계의 문학에 대한 생각은 한시뿐만 아니라 시조의 창작에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 한시와 시조가 성정을 기르는 데 같은 구실을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시조 의 발문은 그의 시가에 대한 생각과 문학에 대한 생각을 충분히 알 수 있게 해 준다.
이를 보면 우리나라의 한림별곡류는 대부분 음란하여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도 문인들이 우리말로 노래를 지을 수 있음을 인정하였으며, 나아가 이별이 지은 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은 겸손한 표현, 근실한 내용 등으로 온유돈후한 성질을 나타낸 문학으로 고려조 시가에서 조선조 시가로의 변화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의 문학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그의 발문의 취지와 잘 어울리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이 발문에서 중요한 것은 퇴계의 국문시가에 대한 인식이다. 그는 한시는 노래로 부를 수 없고 읊는 데 그쳐야 하지만 시조는 노래로 부를 수 있다고 하였다. 시조의 중요성을 그가 인정한 것이며, 성정을 기르는 데도 시조가 훨씬 긴요함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울러 은 흥을 돋는 노래 가락이나 시가로만 불려진 것이 아니라 시 전체가 교육적인 시가임을 알 수 있다. 이황이 지은 시는 2천여 수나 되지만 시와 음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은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은 그의 시를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비록 한자어가 많이 생경한 감을 주지만, 이황이 고도의 한학자이면서도 한글을 통한 쉬운 어법을 구사하여 특출한 언어미를 보여 주었다는 데 문학사적 의의를 더해준다.

2. 율곡 이이와

1) 생애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는 강원도 강릉 북평 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俶獻), 호는 율곡(栗谷)ㆍ석담(石潭),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사헌부 감찰을 지낸 이원수(李元秀)와 사임당 신씨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이는 조선 중기의 학자로 당대의 거유(巨儒)인 퇴계 이황과 함께 우리나라 성리학의 양대 산맥 중의 하나이다. 그는 이기철학(理氣哲學)의 이론가로,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제시하였다. 이이의 생애는 태어나서 29세까지를 성장기, 30세부터 49세로 사망할 때까지를 사환기(仕宦期)로 구분할 수 있다.
서문, 시화에 뛰어난 신사임당은 이이의 초기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이는 8, 9세부터 신동으로 소문이 났고,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세에 어머니가 별세하자 3년 상을 치른 뒤 19세에 금강산에 입산하여 불교를 공부하고, 선학을 수행하여 학문의 시야를 넓히고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성리학의 심오한 형이상학 체계는 원래 불교의 교리에서 자극받은 것이었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가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황(李滉)을 만났다. 이황의 35세 연하인 이이는 성리학으로 시대의 병폐를 고쳐야 한다는 데 의기가 통했다. 이황은 제자 조목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표현으로 이이를 촉망했다. 이이는 23세에 별시에서 을 지어 장원하고, 이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 예조ㆍ이조의 좌랑 등의 육조 낭관직, 사간원정언ㆍ사헌부지평 등의 대간직, 홍문관교리ㆍ부제학 등의 옥당직, 승정원우부승지 등의 승지직 등을 역임하여 중앙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아울러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맡아서 지방의 외직에 대한 경험까지 쌓는 동안, 자연스럽게 일선 정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사단칠정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1576년(선조9년)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참고문헌
김상진, 『16ㆍ17세기 시조의 동향과 경향』, 국학자료원, 2006.
김혜숙, 「와 정신의 높이」,『한국고전시가작품론2』, 집문당, 1992.
성낙은, 『고시조 산책』, 국학자료원, 1996.
정재호, 『한국 시조 문학론』, 태학사, 1999.
조두현, 『고시조 감상과 해설』, 대일출판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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