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세] 중국의 한반도 정책(현안과 전망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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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국제정세] 중국의 한반도 정책(현안과 전망을 중심으로)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1. 중국의 외교 정책 개괄
(1) 중국의 외교 정책 연구 방법
1) 결정구조 및 과정
2) 결정요인
3) 대외관계 연구
(2) 중국 외교전략의 변화
1) 냉전시기
2) 개혁기 중국의 현대화 외교
3) 탈냉전시기의 중국의 대국외교

Ⅱ. 본론
1. 전통 중국과 한반도의 관계
(1) 삼국시대의 중국과 한반도
(2) 고려시대의 중국과 한반도
(3) 조선시대의 중국과 한반도
(4) 소결
2. 중북관계
(1) 한국전쟁과 동맹 시기
(2) 노선차이와 분열의 시기
(3) 탈냉전 시기
(4) 북한과 중국의 새로운 협력관계 모색
3. 중한관계
(1) 적대적 갈등 시기
(2) 개혁개방과 긴장완화 시기
(3) 평화 공존시기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1) 선린 우호협력관계 시기(1992~1997)
2) 협력동반자관계 시기(1998~2002)
3) 전면적 협력동반자관계 시기(2003~현재)
4. 중국과 한반도의 주요 사안들
(1) 북한 핵문제와 탈북자 문제
(2) 역사문제
(3) 경제협력 및 FTA문제

Ⅲ. 결론
1. 천안함 사건 및 정리
(1) 천안함 사건의 전말
(2) 천안함 사건에 대한 중국의 입장표명
(3) 중국의 입장표명에 대한 외신, 청와대의 평가
(4) 중국의 태도를 바라보는 한국의 관점들 (비판론 vs 신중접근론)
(5) 결론 및 정리

본문내용
2. 북한-중국 관계

중국과 북한은 냉전시대의 사회주의라는 이념적인 연대와 지정학적 친밀성으로 바탕으로 맺어진 특수한 형제적 관계이다. 양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성립된 사회주의 국가이며, 국가의 성립 시기에 상호간 인적, 물적인 지원이 지속되었다. 그래서 중국과 북한 간에는 깊은 혁명적, 정서적 연대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중국과 소련 간의 이념적 논쟁에 이어 양국간에도 1960년대부터 이념논쟁이 불거졌다. 1980년대 이후에는 중국이 경제발전을 최우선 국가정책목표로 설정하고, 실리외교를 추진하면서 양국간 점차적 괴리가 나타나게 되었다. 1992년에는 한∙중 수교로 중국과 한국간에 경제적, 문화적, 정치 군사적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북한은 상대적으로 고립되었고, 북∙중 관계는 상당한 정도로 악화되었다. 중국과 북한은 표면적으로는 정치적, 군사적인 면에서 변함없는 우호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과거의 혁명적 혈맹관계의 색채는 많이 약해졌다. 양국은 현실적 변화를 인정하면서 북∙중 관계를 실리적 관계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냉전시기 중국과 북한의 혁명적 혈맹관계는 양국의 지도부 간의 밀접한 관계에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양국의 혁명 1세대들, 모택동과 주은래, 김일성 등의 사망과 은퇴로 인해 이러한 유대관계는 약화되었다. 강택민 체제에 들어서면서 중국은 북∙중 관계를 현실적 관계로 변화시켜 과거의 특수한 동맹관계를 벗어나 정상적인 국가간의 관계로 조정하고, ‘전략적 협력관계’를 모색하였다.
정치적 유대관계가 경제적 실리관계로 대체되고, 정치적∙인적 교류에서 경제적 상품 교류로 바뀌게 되었지만, 이것은 중국이 미국의 동아시아전략의 변화에 따른 동아시아의 국제정치적 상황 때문에 경제적으로 별다른 이익이 없음에도 북한에 대한 원조와 협력을 계속 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아무런 조건 없이 북한과의 우호선린관계를 유지했던 유일한 나라인 것이다.
이렇게 북한과 중국은 역사적으로 다양한 관계의 변화를 거쳤는데, 이를 살펴보기 위해 한국전쟁과 동맹시기, 노선차이와 분열의 시기, 탈냉전 시기, 북한과 중국의 새로운 협력관계 모색, 이렇게 4시기로 나누어 보도록 하겠다.

(1) 한국전쟁과 동맹 시기

북∙중 관계는 양국에서 사회주의 국가가 성립되기 훨씬 이전부터 형성되어 왔다. 중국공산당이 항일투쟁과 국공내전을 치르면서 북한으로부터 인적, 물적 지원을 상당히 많이 받았으며, 양국의 무장 항일운동 세력간에 군사적 교류가 빈번했다. 이러한 양국간의 인적 관계를 통해 양국의 공식적인 정부 수립 이후 국가간 정식적인 관계로 전환할 수 있었다.
1949년 1월 중국, 소련, 북한은 3자간의 군사협력체제를 성립하였고, 3월에는 중국, 북한 양자간의 비밀군사협정이 체결되었다. 이것은 미국, 일본, 한국의 자본주의 진영에 맞서는 ‘북방3각관계’ 였다. 이러한 군사적 동맹관계는 북한의 남침을 가능하게 하고 북한이 중국과 소련을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받는 후방기지로 인식하게 하였다. 중국은 1950년 10월에 ‘항미원조, 보가위국’ (抗美援朝, 保家衛國) 이라는 구호 하에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에서 중국의 참전과 북한에 지원은 상호지원적 성격이 강하다. 중국이 국공내전을 겪을 때 북한은 중국에 군수물자와 병력을 지원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이 한국전 참전을 결정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먼저, 중국은 신생 사회주의 국가이었기 때문에 한국전으로 인해 자신의 정권이 전복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면 만주에 까지 전쟁이 확산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북한이 한국전에서 패배할 경우 중국과 자본주의 국가간의 완충지대 사라지게 되는 것이기에 중국은 북한에 직접 원조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중국은 한국전 이전 북한과 소련과의 관계가 발전하는 것으로 인해 북한에 대한 영향력에 위협을 받았다. 한국전 참전을 통해서 중국은 한반도에 대해 전통적으로 배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던 것이다.
1950년 이후 사회주의 체제가 해체될 때까지 북∙중 관계는 동맹, 갈등, 회복 등의 과정을 겪게 된다. 이 시기를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한국 전쟁 이후에도 중국은 북한에 잔류한 중국군들을 북한의 건설사업에 투입하여 군사적, 물질적 지원을 지속하였다. 중국과 소련이 이념 논쟁으로 인해 관계가 악화되자 중국과 북한관계는 밀착하게 되는데, 이것은 소련의 모택동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은 김일성에 대한 비판으로도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1961년에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중조우호협력호조조약)을 맺어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전반 분야의 우호∙협력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중국과 북한은 이를 통해 공동의 외교정책을 채택하여 군사, 정치동맹관계를, ‘평화 5개항 기본원칙’을 토대로 밀접한 경제문화관계를 규정하였다.
경제적으로 중국은 1953년에 맺은 ‘경제문화협력협정’에 의해서 북한에 1957년까지 약 3억 2천만달러를 제공하였고, 1958년에 ‘장기차관협정 및 공식 무역협정’을 체결하고, 1960년에 장기차관을 제공하여 양국간의 경제협력을 증진시켰다. 교역규모는 1억 달러 내외였는데, 북한의 입장에서 중국과의 교역은 전체교역에서 약 25~60%를 차지할 정도로 높았다. 이러한 중국과 북한의 경제교류는 북한의 전후 복구에 초점이 맞추어 졌으며 북한경제가 호전되면서 대중국 수출도 큰 폭으로 상승하였다. 1967년까지 전체교역 대비 북중 교역 비중은 30%를 유지하였다.
이 시기에 중국과 북한은 소련에 대항한 독자적 노선을 따르게 된다. 당시 중국의 대약진운동과 삼면홍기운동, 북한의 주체사상은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2) 노선차이와 분열의 시기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발발하고 소련에서는 흐루시초프의 실각으로 북∙중 관계는 냉각기에 접어들게 된다. 흐루시초프에 이어 소련에는 브레즈네프 정권이 등장하였는데, 북한은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지하였으나 중국은 수정주의로 간주하여 반대하였다. 월남전에 대해서도 북한은 소련의 사회주의권의 공동대응에 의한 월남지원에 적극적이었으나 중국은 수정주의적 자세라고 간주하여 거부하였다. 중국은 사회주의 진영에 대해 비타협적이고 경직된 입장을 고수하면서 북∙소 관계가 급속히 발전하게 되었다. 이는 북한에게 있어서 소련의 핵우산만이 미국으로부터 자국을 보호하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배경이 내포되어 있었다.
문화대혁명 당시 문혁 지도자들과 홍위병은 북한 사회주의를 수정주의라고 비판하였고, 북한은 중국을 편협한 교조주의라고 비판하였다. 1966년에 북한은 공식적으로 중국을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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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중, 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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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록, 굿인포메이션

강택구, 국제지역연구 제13권 제4호

홍현익, 세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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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1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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