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사] 일제하 조선의 은행의 설립과 은행제도의 발달(식민지 `수탈론`과 `근대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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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경제사] 일제하 조선의 은행의 설립과 은행제도의 발달(식민지 `수탈론`과 `근대화론`)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 서론 >

< 본론 >

I. 근대 초기의 은행

1. 일(日)인 경영의 제일은행

2. 조선은행

3. 한성은행

4. 대한천일은행

II. 일제하 식민지 은행제도의 발달과 일반은행

1. 식민지 특수금융기관의 설립

1) 농공은행의 신설

2) 지방금융조합의 설립

3) 구한국은행의 설립과 조선은행의 출범

4) 조선식산은행의 설립

5) 금융조합의 재편과 확장

2. 식민지 일반은행의 난립

3. 조선 상업은행의 성장

1) 조선상업은행의 설립

2) 조선상업은행의 흡수 합병을 통한 성장

① 흡수합병 배경

② 흡수합병 구조

③ 지배구조 변화

< 결론 >


본문내용
3. 한성은행

한성은행 (현 조흥은행의 전신)은 1897년 2월에 설립이 인가되었다.
한성은행을 주도한 세력들은 정치적으로 황실과 밀접했지만, 실질적으로 영친왕을 은행장으로 앞세워 황실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천일은행과 반대로 한성은행은 황실과 정치적 성향을 같이 하는 대관들을 주주로 하고 있었다.
앞서 설명한 조선은행과 달리 초기부터 조 세금 취급 권리를 가지고 좋은 상황에서 영업을 시작하였다. 자본금은 20만원으로 주당 50원씩 4천주를 발행할 계획이었으나, 조선은행과 마찬가지로 순조롭지 않아 실제 불입금은 4만5천원에 불과하였다. 한성은행의 영업은 정부의 보조금과 조 세금으로 조달한 자금으로 단기어음할인, 일본 화폐환전, 객주를 대상으로 한 대부를 주요업무로 하였다.
한성은행은 1989년 1월과 1899년 2월에 배당금을 지급하였는데 초창기 배당금 지급의 재원은 안정적이고 큰 규모의 조 세금취급에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세권이 1899년에는 그 해 설립된 대한천일은행으로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한성은행의 영업은 극도로 부진한 상태에 빠지고 도산할 지경에 이르지만, 법적인 폐점이나 청산은 아니었고 이 후에도 영업을 계속되나 소위 개점휴업상태였다.
그런데 1903년 2월 7일에 한성은행이 다시 설립되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친러정책이 친일정책으로 전환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896년에 발생된 아관파천으로 인해 러시아공사는 고종에게 500만원의 차관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였다. 500만원의 차관을 받아들이냐 말것이냐는 러시아 자신들의 세력의 기반이 되느냐 마느냐 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일본은행인 제일은행에 부속된 형태로서 한성은행을 재설립하면서 러시아의 500만원 차관교섭을 깨뜨리는 효과적인 방법이 되었다.
이에 따라 1897년에 설립 후 휴업 중이던 한성은행의 상호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1903년 2월 7일에 이재완, 김종한, 이보덕, 한상용 등이 발기인이 되어 합자회사 공립한성은행이 설립되었으며 3만5천원의 자본금을 가지고 영업을 개시 하였다. 공립한성은행의 영업은 제일은행에 부속된 형태였으며, 제일은행의 저리의 자금을 고리로 대부하여 차액을 취하는 형식이었으며, 제일은행의 일선창구 역할을 하였다. 정부도 지원을 하지 않았으며, 1905년에 이르기까지 영업은 부진을 면치 못했다.

4. 대한천일은행

대한천일은행 (현 우리은행의 전신)은 광무 3년 (1899년)3월 창설되었다. 한성은행에 비해 황실의 지원이 보다 직접적이고 강력하였다는 것이 특징이다. 은행설립을 최초로 논의한 사람들은 백완혁, 조진태, 김두승, 김기영 등이며 이들은 서울의 유력한 재력가들이었다. 은행이 정식인가 되기 전 1899년1월 고종은 내하 금 3만원을 지급하여 사실상 영업을 개시토록 하였다. 자본금은 5만 6천원으로 주당 500원씩 112주를 발행할 계획이었으나, 1899년말까지 모인 자본은 13,800원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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