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문화][답사보고서] 국립중앙 박물관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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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예술과문화][답사보고서] 국립중앙 박물관 답사기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문자도

Ⅲ. 모란도

Ⅳ. 풍속화

Ⅴ. 산수화

Ⅵ. 초상화

Ⅶ. 이상형 월드컵 !
① 문자도
② 모란도
③ 풍속화
④ 산수화
⑤ 초상화

Ⅷ. 결론

본문내용
Ⅲ. 모란도

모란의 등장은 오래 전부터이다. 모란은 꽃이 크고 그 색이 화려하여 동양에서는 고대부터 화왕, 부귀화 등으로 불려왔다. 중국 진한 시대 미자부터 약재로 재배되었으며, 남북조 시대 초기에 감상의 대상인 관상용 꽃으로 문헌에 등장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의 모란에 관련된 가장 이른 기록은 선덕 여왕이다. “꽃은 화려하지만 꽃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아무래도 향기가 없겠구나”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 후 꽃이 피어보니 꽃에 향기가 없었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들어 봤을 것이다. 또한, 설종의 글 가 『삼국사기』에 전한다. 이렇듯 모란은 예로부터 좋은 꽃으로 여겨져 왔다. 심지어 모란으로 앞날의 길흉을 점치기도 하였다. 꽃과 잎이 아름답고 풍성하게 피어나면 복된 앞날이 있고, 꽃이나 잎이 갑자기 시들면 불길한 일이 생겨날 것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모란의 의미는 무엇일까? 모란은 부귀와 명예, 공명을 상징한다. 화목한 가정, 절세미인 등을 의미하기도 하며 나비, 백두조 등 다른 문양과 함께 자주 그려지기도 한다. 백두조 한쌍과 함께 그려지면 머리가 하얗게 셀 때까지 부귀한다는 뜻이며, 나비와 함께 그리면 남,녀 간 화합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러한 모란의 의미 때문에 신부의 예복에도 수놓아 졌으며, 민간과 궁중에서 모두 모란을 잘 그렸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조선의 모란도를 10점을 전시했다. 조선시대의 모란도를 연도별 흐름에 따라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 초, 중기의 모란도는 다른 문양과 함께 어우러지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조선 후기에는 모란의 비중이 커지고 풍성함이 강조되었으며 채색도란도/묵모란도로 다채롭게 그려진다. 조선 말기에는 모란만 단독으로 그려진 모란도가 유행했다. 이로 인해 모란이 더 부각되고 필법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모란은 주로 병풍으로 제작되었는데, 4~10폭에 거의 같은 모양의 모란이 그려진 형태로 전한다.
궁중과 민간에서의 모란은 각각 어떠할까? 모란병풍은 조선시대 왕실에서의 종묘제례, 흉례, 가례 등 주요 궁중 의례에 사용되었으며,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봉안하는 곳에 놓였다. 궁중에서는 부귀 영화의 의미를 넘어 국태민안, 태평성대 등으로 까지 여겼던 것으로 추정된다. 민간에서의 모란은 다른 상서로운 요소가 조합된 민화로서 많이 남아 있다. 민화는 장식장소와 용도에 따라 종류를 달리하는데 이를 화목별로 분류하면 화조영도모, 어해도, 작호도, 십장생도, 산수도, 풍속도, 고사도, 문자도, 책가도, 무속도 등이 있다. 모란은 이 중 화조영모도에 속하는데 화조영모도는 민화 가운데 종목이 가장 많으며, 꽃과 함께 의좋게 노니는 한 쌍의 새를 소재로 한 화조도가 많다. 주로 병풍으로 재구성되어 신혼부부의 신방 또는 안방 장식용으로 쓰인다.
국립중앙박물관을 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집과 가까워 어렸을 적부터 가본 기억이 꽤 있다. 그러나 그 때는 그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을 시절이다. 따라서 선생님을 따라, 부모님을 따라, 혹은 여름방학 과제를 위해 가서 쭉 훑어 보는 식이였다. 그러나 대학생이 되고, 예술과 문화의 수업을 듣고는 조금은 달라진 것 같다. 그림 옆에 있는 해설들을 보면 배웠던 용어도 나오고 들어봤던 작가들, 기법들이 나와서 익숙한 느낌을 받는다. 이번에도 사실 처음에는 그냥 쭉 훑어보았다. 그리고 각자 맡을 부분 나누고, 나는 모란도를 맡게 되었다. 대략 열 점 정도 전시가 되어있었는데 큐레이터의 설명을 들으면서 자세히 보기 시작했다. 여기서 먼저 언급하는 것은, 미술에 대해 자세히 처음으로 접한 대학생으로서, 모란도에 관련된 책을 도서관에 검색해 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따라서, 미술사를 보는 관점에서의 내 스스로의 감상과 짧은 설명의 방식으로 쓰겠다.



• 작가 모름, 조선 18세기, 비단에 색
1921년 처음 박물관에 들어와, 반년간의 보존처리를 거쳐 첫 선을 보이는 모란도 병풍이다. 가로 길이 6미터, 높이 2미터로 굉장히 큰 10폭 병풍이다. 색색의 꽃과 무성한 잎이 돋은 모란 나무가 자연을 배경으로 하여 다양한 모양과 색의 괴석이 어우러졌다. 10폭에 이르는 대형화면에 연속적으로 펼쳐진 모란 나무들은 화려하고 당당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모란나무를 괴석의 앞, 뒤에 배치하거나 9,10폭에 보이는 것처럼 다소 뒤쪽에 그려서 일률적인 반복을 피하고 변화를 주고 있다. 괴석과 함께 그려졌으니 석모란도(石牡丹圖)라 할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이 크기로 짐작하건대 궁모란도(宮牡丹圖)가 아니였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보통 전시된 4폭 병풍도 마찬가지로 각 폭에 독립적으로 모란을 그린다. 그런데 이 10폭 병풍은 모란 전체의 모습을 10폭에 나눠 한꺼번에 담았다는 것이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10폭 병풍은 또한 조선시대 원래의 장황(표구) 형태와 비단 배색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대단히 장식적이고 양식적인 느낌이다. 딱 보기에도 정말 화려하고 색채가 눈에 띈다. 심지어 괴석 또한 화려하다. 각 폭에 모란이 단독으로 또는 괴석과 모란이 함께 그려져 각기 독립적이고 도식적인 화면을 이루는 19~20세기의 ‘궁모란병(宮牡丹屛)’ 이전 단계의 양식을 보여준다. 즉, 10폭이 모두 이어지며 자연 속에 피어난 모란꽃의 모습으로 그려져 조선시대 모란병풍의 전개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주목된다.



• 작가모름, 조선후기, 종이에 색
80년 만에 공개되는 10폭 병풍이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러나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4폭 병풍이었다. 4폭 병풍 역시 그냥 모란 꽃 송이가 참 크고 풍성하게 그려졌구나 생각했었다. 그러나, 4폭마다 그려진 모란의 모습이 달랐다. 맨 왼쪽은 바람에 흩날리는 모란의 모습을 두 번째는 피어나기 시작하는 모란의 모습을, 세 번째는 만발한 모란의 모습을, 네 번째는 지기 일보 직전의 모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큐레이터는 아마도 8폭이 아니었을까라고 추측한다고 했다. 8폭일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나도 더 그림이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흰 모란과 붉은 모란이 7~8송이씩 핀 모란나무를 폭에 각각 그렸다. 아래쪽에 땅에서 솟은 모란 나무줄기와 작은 바위가 보인다. 모란꽃이 특히 크게 그려졌고, 농담의 차이를 주지 않고 모두 진하게 채색되었다 배경이나 자연적인 요소가 최소화되고 모란이 화면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으며, 각 폭에서 거의 같은 모습의 나무가 반복되어 그려져 있다.



▲허련(1809-1893)그림, 종이에 먹, 이홍근 기증

◀심사정(1707~1769), 조선 1767년,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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