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문화] 연산군 vs 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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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역사와 문화] 연산군 vs 광해군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문
Ⅱ.연산군
1. 연산군은 어떤 왕이었는가?
2. 연산군의 업적
3. 연산군 대의 시대적 배경
3.1 경제적 & 대외적 배경
3.2 정치적 배경
3.2.1 무오사화
3.2.2 갑자사화
4. 연산군의 폐위
4.1 당시 백성들의 태도
4.2 연산군의 정치와 폐위
4.3 연산군이 폭군이라고 왜곡된 배경
Ⅲ.광해군
1. 광해군의 세자 책봉
2. 대북파 vs 소북파
3. 광해군의 즉위
   3.1 광해군은 어떤 사람인가?
3.2 광해군의 업적
      3.2.1 민생 안정
      3.2.2 왕권 강화
      3.2.3 문화
      3.2.4 외교 정책
4. 광해군의 폐위와 죽음
Ⅳ.두 왕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Ⅵ.조사하며 느낀 점
참고 문헌
본문내용
*폭정과 폐위 11 ~ 12년*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의 폭정은 정치적, 비정치적 분야를 가리지 않고 거의 비이성적 수준으로 일상화하였는데 그 폭정을 정치적, 비정치적 분야로 나누어 살펴보면
-정치적 분야 : 능상의 핵심적 원이었던 언론기관의 기능을 극도로 제한, 지평과 정언의 관직을 없앰, 사간원 자체를 혁파, 홍문관도 폐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음. 세부적으로는 대간의 모든 상소에 그 발언자와 동의자를 명시케 하고, 정책을 심의하는 권한인 서경권을 박탈했으며, 모든 대간은 3품 이상의 관원으로 임명케 했다. 그 동안 제대로 참석하지 않았던 경연 또한 아예 철폐. 이런 제도적 파행은 결국 정무 정치나 국가 행정에 관계되는 사무
와는 전혀 무관한 부서인 내시부가 이 시기의 주요한 국정을 관장하는 데까지 이름.
-비정치적 분야 : 내수사의 기능 강화를 통한 왕실 재정 확충과 교육 탄압이 이루어짐. 특히 연산군은 그 동안 삼사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거나 미래의 삼사와 관련될 가능성이 컸던 유생들을 길들이는 데 집중. 성균관의 각종 시설을 철폐하고 교육 과목과 의례를 변경했으며 불경한 유생을 감찰해 처벌함.
이러한 제도 개편들은 그래도 어떤 정책적 목표를 제한된 범위에서 이루어진 국왕의 통치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개인적 감정과 맞물린 사안들은 그야말로 광기 어린 발단과 전개 과정을 거쳐 파괴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연산군은 여느 국왕들보다 자신의 개인적 성향을 현실정치에 직접 투영한 비중이 훨씬 컸다. 즉, 그의 정치적 실패는 그의 인간적 특징과 일반적인 경우보다 좀 더 많은 관련을 갖고 있었다. 연산군의 개인적 특징 중 가장 중요하고 남다른 측면은 과도한 집착에 따른 자기 제어의 부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서로 인과적 관계에 있는 이 문제는 갑자사화 이후 극단적인 형태로 계속 나타남으로써 연산군의 통치를 유례없는 폭정으로 전락시킨 핵심적 원인이 되었다. 폭정 때문에 폐위될 것을 두려워하여 폐위되기 직전에는 “지금 신하들은 안락에 젖어 있으니 변고가 생기면 죽을 신하가 있을 것인가”하고 개탄하면서 자신이 반정과 같은 사태로 쫓겨나리라는 것을 예감했는데, 그것은 정확히 현실화 되었다.

4.3 연산군이 폭군이라고 왜곡된 배경
① 언론혁파 : 당파조성을 봉쇄하기 위한 조치였다.
만일 연산군이 반정을 봉쇄하기만 했다면 연산군 역시 태종과 세조 못지않게 많은 업적을 남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국력증진을 추진했다면 이후 조선의 역사는 완전히 새롭게 쓰여졌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② 전례 예로부터 전하여 내려오는 일 처리의 관습.
와 상례 파괴 :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왕조에서 상례에 관한 의식은 엄격하기 그지없었다. 건국 초기만 해도 상례가 그다지 까다롭지는 않았다. 사실 성리학에 따라 더욱 까다로운 형식으로 굳어진 상례는 성리학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 가운데 하나였다. 이 상례를 둘러싼 논쟁으로 말미암아 조선왕조 내내 국력을 엄청나게 소모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현종 때 상례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된 이른바 ‘예송 시비’가 그 대표적인 실례이다.
인수대비의 상례는 원칙상 깎아야 했다. 연산군은 원래 인수대비의 상례를 대통을 이은 안순대비와 같이 할 수 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는 왕통을 중시한 연산군으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덕종보다는 높이고 안순대비보다는 낮추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이는 명분과 실리를 모두 고려한 매우 합당한 조치였다.
국기일 폐지는 현명한 조치였다. 왕조시대에는 선왕, 선후가 승하한 날이 모두 국기일이었다. 그러니 후대로 내려갈수록 국기일이 엄청나게 늘어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조선왕조가 오랫동안 지속되면 한 해의 대부분이 모두 국기일로 채워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국기일의 가장 큰 문제는 제사에 들어가는 비용도 비용이지만 이날만큼은 왕을 포함한 모든 대소 관원들이 하던 일을 모두 멈추었다는 데 있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연산군이 국기일을 없애고 사대부에게 이를 좇도록 조치한 것은 오히려 높이 평가해야만 한다. 당시 연산군은 번
참고문헌
(참고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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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 『왕을 위한 변명』, 경기도 파주 : 김영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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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항녕, 『조선의 힘』, 서울 : 역사비평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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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웹사이트)
*네이버 블로그, (http://blog.naver.com/yoohd19?Redirect=Log&logNo=110020375175)
*네이버 블로그. (http://blog.naver.com/dahong63?Redirect=Log&logNo=10037520383)
*네이버 지식인,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001&docId=56852632&qb=7Jew7IKw6rWwIOq0ke2VtOq1sCDssKjsnbQ=&enc=utf8§ion=kin&rank=6&sort=0&spq=0&sp=1&pid=f+LDIdoi5TGssZzi61dsss--318452&sid=S%40Nl6UNK40sAAEzZEt8) *엔싸이버 백과사전,
(http://www.encyber.com/search_w/ctdetail.php?masterno=127594&contentno=1275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