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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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북한의 근현대사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해방과 초기 북한의 정치질서

- 해방과 ‘붉은 군대의 진주
- 김일성의 귀국과 정치무대 등장
-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창설
- 모스크바협정과 좌우연립의 붕괴
- 토지개혁과 분단의 심화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2. 6.25전쟁과 전체주의 체제의 시작

- 전쟁의 피해
- 중공업 우선정책과 농업집단화
- 8월 종파사건과 반종파투쟁
- 집단체제의 성립과 경제성장

3. 국방∙경제의 병진과 주체사상의 등장

- 중소분쟁과 등거리외교
- 4대 군사노선과 군사주의화
- 주체사상의 대두
- 1960년대 북한의 사회와 문화

4. 권력세습과 김정일시대의 개막

- 대중동원의 일상화와 후계자 권력의 공고화
- 경제의 침체와 제한적 개방 시도
- 수령유일 체제와 가계우상화

5. 탈냉전 시대의 도래와 북한의 위기

- 공산주의권의 몰락과 경제난
- 김일성의 사망과 김정일 체제
- 선군정치와 핵개발
- 이어지는 탈북행렬
- 국가 주도의 범죄활동
- 무너지는 수령체제
- 6.15남북공동선언
- 10.4남북정상선언
본문내용
2. 6.25전쟁과 전체주의 체제의 시작
- 전쟁의 피해
6.25전쟁은 북한이 우월한 군사력을 이용하여 한반도의 공산화 통일을 위해 소련의 승인과 중국의 지원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전쟁이었다. 전쟁은 미국이 공산주의 국제세력의 공세로부터 남한을 방어하기 위해 참전하고, 뒤이어 중국이 북한을 돕기 위해 참전함으로써 국제전으로 발전하였다. 그 결과 북한에서도 남한과 마찬가지로 막대한 전쟁피해가 발생하였다. 군인 가운데 사망.부상.행방불명자는 60만~90만 명에 달했으며, 중공군도 대략 같은 규모의 피해를 입었다. 북한의 산업 피해도 컸다. 제공권을 장악한 유엔군의 폭격으로 산업시설과 군수공업이 밀집한 평양 등 주요 도시가 크게 파괴되었다. 농업기반도 심하게 파괴되어 식량이 극도로 부족하게 되었다. 농업기반의 파괴는 전쟁이 끝난 뒤 북한이 곧바로 농업집단화를 추진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인적피해는 노동력의 부족으로 연결되었다. 숙련 노동의 부족은 전후 복구에 커다란 장애로 작용하였다. 전쟁은 북한 사회에 심한 붏신과 갈등을 초래하였다. 월남자의 가족과 유엔군에 협조했던 사람은 철저한 탄압과 감시를 받았다. 김일성은 남한 내의 조직 붕괴로 정치적 기반이 약해진 남로당 지도자 박현영을 전쟁과 책임을 물어 숙청 하였다. 다른 남로당 출신자들도 대부분 큰 어려움을 겪었다. 전쟁으로 미국에 대한 북한의 적대의식은 고조되었으며, 그 결과 북한은 점차 외부 세계와 단절 되어 갔다.
- 중공업 우선정책과 농업집단화
전후 북한은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산업의 복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북한은 중공업 발전에 큰 역점을 두었다. 중공업을 통해 공업화에 필요한 자본재를 생산하고 자주국방을 위한 군수공업을 일으키기 위해서였다. 김일성의 중공업 우선정책은 당내의 반대에 직면하였다. 한정된 자원을 중공업에 투입하면 당장 시급한 식량과 소비재를 충분히 생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국가들로 구성된 경제기구인 상호경제원조회의(COMECON)도 자본재 생산보다 농산물과 소비재 생산에 주력할 것을 권했지만, 김일성은 거부하였다. 김일성은 중공업 우선정책을 관철시키고자 농촌을 협동농장으로 재편하는 집단화 정책을 추진했다. 개별 농가를 리(里)단위의 농장으로 편입하여 공동노동과 공동분배를 시행하면, 농업생산성이 향상되어 남는 노동력과 식량을 중공업 부문으로 돌릴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집단화 정책에는 농촌사회에 남아 있는 자본주의 요소를 제거할 목적도 있었다.

- 8월 종파사건과 반종파투쟁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무정과 허가이, 박헌영 등 김일성의 주요 경쟁자들이 숙청됐지만, 소련파와 연안파의 인사들은 아직 당내에 포진하며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전후 복구 과정에서 김일성의 노선에 반기를 들다 ’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결정적으로 반김일성 운동에 나서는데, 오히려 김일성파에게 역공을 당하면서 숙청의 길로 내몰리게 된다. 북한 역사에서 ‘8월 종파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김일성에게는 정치적 위기였지만 결과적으로 북한 내에서 김일성의 정치적 반대파를 거세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안정식 기자, ’북한 포커스’]

- 집단체제의 성립과 경제성장
비판세력을 제거한 김일성은 중공업 우선정책과 농업집단화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1958년 농업집단화가 완료되어 1946년 토지개혁을 통해 분배받은 소농들의 토지는 협동농장으로 편입되었다. 이전까지 북한은 자신을 인민 민주주의 국가로 규정했었다. 그러다가 북한은 토지소유의 집단화가 완성되면서 스스로 사회주의 국가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명칭이야 어쨌든 북한은 조선노동당의 일당독재, 소유의 집단화, 김일성의 절대권력을 통해 서서히 전체주의적 공산주의 체재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이후 북한은 1930년대의 소련과 같은 경제발전을 추구하였다. 1958년 소련의 스타하노프운동(Stakhanovakoe Dvizhenie)을 모방한 천리마작업반운동을 시작하였다. 이는 작업반 단위로 생산량을 경쟁적으로 늘리기 위한 노력동원운동이었다. 천리마운동은 1956년부터 착수한 5개년 경제발전계획을 1년 앞당겨 달성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공업 분야에서는 괄목할만한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4년 동안 공업생산을 3.5배 늘였으며, 연평균 공업성장률은 37%에 달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제한된 자원과 초보적 기술수준에서 노동력을 최대한 동원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곧바로 한계에 봉착할 수 밖에 없는 성장전략에 불과하였다.

3. 국방∙경제의 병진과 주체사상의 등장
- 중소분쟁과 등거리외교
1956년 제20차 소련공산당 대회에서 스탈린을 격하함으로써 집권한 흐루시초프(Nikita Khrushchev)는 미국과 평화공존 외교노선을 밝혀 중국으로부터 수정주의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대해 소련은 중국을 교조주의라고 비난함으로써 중소분쟁(中蘇紛爭)이 시작되었다. 북한은 내심 중국의 입장을 지지했지만, 소련의 경제지원이 필요했기에 이를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중소분쟁이 격화되면서 북한은 점차 중국을 편들었다. 김일성을 비롯한 조선노동당 간부들은 중국공산당 출신이고, 또한 6.25전쟁에서 함께 피를 흘린 중국의 입장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런데 1964년부터 전면전으로 확대된 베트남 전쟁에서 중국이 북베트남에 대한 지원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자 북한은 중국에 실망하였다. 1966년부터 진행된 중국의 문화혁명에서 홍위병들이 중국공산당의 당권파를 공격하고 당중앙위원회를 전복하는 등의 혼란을 보이자, 북한은 이러한 풍조가 북한에 북한에 전파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중국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다. 중국의 문화혁명 세력은 김일성의 이러한 태도에 배신감을 느끼고 김일성을 심하게 비판했는데, 이로써 북한과 중국은 냉랭한 관계가 되었다. 이때부터 김일성은 자주노선을 내걸고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등거리외교를 추구하였다.

- 4대 군사노선과 군사주의화
중소분쟁을 계기로 북한은 6.25전쟁 때 양국이 보냈던 지원을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다는 판단하에 군수공업 건설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와 함께 전 인민의 부장화, 전 국토의 요새화, 전군의 간부화, 군장비의 현대화라는 4대 군사노선을 기치로 내걸었다. 이 노선에 따라 북한은 점차 군사 체제로 변하였다. 1962년 북한은 경제와 국방의 병진정책을 내걸었다. 그런데 조선노동당 내에는 경제건설에 부담을 주지 않을 정도로만 국방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는 현실주의적 온건파와 경제건설에 상당한 손실을 감수하고서라도 국방력 강화에 우선적으로 힘을 쏟아야 한다는 강경파의 대립이 있었다. 1967년까지 박금철,이효순,등 실용주의적 온건파가 노동당의 핵심 위치에 이었기에 군사비는 급격히 증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온건파가 노동당의 핵심 위치에 있었기에 군사비는 급격히 증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온건파가 숙청되자 군사비가 급격히 늘어 1967년 북한의 군사비가 정부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이전의 20% 미만에서 30% 선으로 급증했다. 남한에 대한 군사도발도 강화되었다. 1968년 북한은 청와대 기습사건, 푸애를로호 납치사건, 울진.삼척 무장공비침투사건을 감행하였다.

- 주체사상의 대두
김일성은 1964년 소련에서 흐루시초프가 축출되고 1966년 중국에서마오쩌둥과 당권파 사이의 권력투쟁으로 문화혁명이 일어나자 위기감을 느꼈다. 1967년 김일성은 국방우선론을 내걸고 군부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다음, 경제건설 우선론을 주장하는 당내 2인자 박금철을 비롯하여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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