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사회와 문화]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이 유럽사회에 미치는 영향

 1  [유럽사회와 문화]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이 유럽사회에 미치는 영향-1
 2  [유럽사회와 문화]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이 유럽사회에 미치는 영향-2
 3  [유럽사회와 문화]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이 유럽사회에 미치는 영향-3
 4  [유럽사회와 문화]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이 유럽사회에 미치는 영향-4
 5  [유럽사회와 문화]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이 유럽사회에 미치는 영향-5
 6  [유럽사회와 문화]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이 유럽사회에 미치는 영향-6
 7  [유럽사회와 문화]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이 유럽사회에 미치는 영향-7
 8  [유럽사회와 문화]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이 유럽사회에 미치는 영향-8
 9  [유럽사회와 문화]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이 유럽사회에 미치는 영향-9
 10  [유럽사회와 문화]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이 유럽사회에 미치는 영향-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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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유럽사회와 문화]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이 유럽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2. 본문

3. 백년전쟁 전개와 잔다르크에 대한 민족의식 변천

4. 영국과 프랑스의 민족의식 속에서 오늘날의 관계

5. 전쟁 직후의 모습(잔 다르크의 영향력) + 절대 왕정까지의 발전에 대한 영향력

6. 결론

* 참고 문헌
본문내용
2. 본문

116년동안 지속되었던 백년전쟁은 프랑스와 영국간의 일어난 전쟁이다. 두 민족이 처음으로 충돌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문화와 문화간의 충돌, 경제, 사회에 걸쳐 모든 부분의 충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국이 프랑스내부의 영토를 소유하였기 때문에 양국간의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이 이유는 당시영국의 헨리2세와 아키텐공녀와 결혼이 원인이었다. 당시 문화중에 결혼을 하면 여자의 영토가 남자의 소유가 되어 남자에게 넘기는 관습이 있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내의 영국령땅이 생기게 된 것이고, 당시봉건제도 하에서 영국왕은 영국의 왕이면서 프랑스 왕의 신하라는 두가지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이것으로 당시 중세시대의 결혼문화를 확인 할 수 있다.) 두 국가 간의 이러한 영토문제의 갈등은 왕위계승권의 문제로 인해 발생하게 되었다. 1328년 프랑스 카페왕조의 샤를 4세가 남자 후계자가 없이 사망하자, 그의 4촌 형제인 발루아가의 필리프 6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에 대하여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그의 모친이 카페왕가 출신(샤를 4세의 누이)이라는 이유로 프랑스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양국 간에 심각한 대립을 빚게 되었다. 그 이유로 영국은 플랑드르 플랑드르 : 유럽최대의 모직물 생산지, 당시 모직물 원료인 양모는 영국이 주 공급지였음.
에 수출해 오던 양모공급을 중단하고, 프랑스는 포도주 생산지로유명한 기옌 기옌 : 지금의 가스코뉴 지방
을 지방의 몰수를 선언했다. (이 당시 기옌은 와인의 명산지인데, 와인에 매겨지는 세금은 큰 수입이 되므로 경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후자는 백년전쟁을 와인전쟁이라고 말할만큼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영국이 프랑스를 경제적 혼란에 빠뜨리게 하기위한 것이었다. 이를 근거로 백년전쟁이 시작하게 되었다.
때문에 경제적인 측면에서 플랑드르는 프랑스왕의 아래하에 있었지만, 유럽 최대의 모직물 공업지대로서 번창하여, 원료인 양모의 최대 공급국인 영국이 이 지방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기옌 또한 와인생산지라는 것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번창하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두 지역이 대립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는 프랑스내의 영국령땅인 플랑드르지방을 소유하길 원하고 있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두 지방을 소유하게 되면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가질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에 이 두지방의 쟁탈을 목적으로 전쟁이 시작되게 된 계기이기도하다.
당시 백년전쟁이 발발할 무렵 프랑스의 필리프 6세는 강력한 군주권을 유지하지 못했다. 전쟁에 필요한 세금을 걷기 위해서는 성직자, 브루주아, 귀족에게 권력을 양보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귀족과, 성직자의 권력이 크게 향상했기 때문에 이당시 삼부회 삼부회 : 프랑스의 구제도(舊制度) 아래에서의 신분제(身分制) 의회.
의 정치권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상류층위주의 사회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것은 필리프6세가 용감하긴 하나, 정치적 감각이 부족한 탓이기도 했다. (이 당시 사회적으로 귀족, 브루주아, 성직자의 권력이 큰 것으로 보아 당시 봉건국가의 모습을 대변해 주며, 삼부회라는 단어로 당시가 계급사회문화인 것을 확인 할 수 있으며, 삼부회의 권력이 막대하였음을 보여준다.)
때문에 왕의 권력이 약해지고, 귀족들의 세력이 강해지게 되었다.
이 당시 시민들의 자유 또한 확보될 수 없었다. 백년전쟁이 일어난 중세시대에는 유럽의 도시민들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왕이 봉건영주와 싸워 자유를 확보하였다. 자신들의 자유를 보장받고, 경제적인 보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직접 할 수 있는 일은 직접 봉건영주와 싸워 자유를 확보하는 일 뿐이었다. 철저한 봉건제도사회이기 때문에 아래계급의 소시민들은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자신들의 자유 또한 보장되지 못했다. 자신들의 자유는 자신보다 위의 계급에 세속 되어 있었고, 경제적인 이유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의식이라는 것이 자리 잡기란 만무했다. 민족은 고대부터 중세에 걸쳐 점차 집단으로서 확대되고 통일되었지만, 개개인이 민족 구성원으로서 자기를 의식하고 명확한 민족적 자각을 가지진 않았다. 또, 이 당시 민족의식 또한 당시의 봉건제도에 묶인 사회와 작은 영주국가의 관념에 만연해 사람들의 민족의식이 자리 잡히지 않았다. 당시 개개인의 생활을 하루하루 유지하기 힘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사람들에게 민족의식이라는 것을 생각할 여유란 것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민족의식의 개념보다는 단순한 국가의 일원이라는 개념이 좀 더 가까울 듯 싶다. 전쟁으로 나라가 들썩이고 있는 와중에 정작 나라의 시민들은 인간다운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중세시대의 현실이었다. 사람들의 생활이 나아지지 않고, 귀족들만이 풍족하게 살며, 없는 사람들을 약탈하고, 가지려는 탐욕만이 난무했을 뿐이다. 탐욕스러움만이 가득차고, 왕의 권한까지 양보하기를 바라는 귀족들 앞에서 힘이 약한 시민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사람들에게는 앞서 말한 것처럼 국가를 위한, 국가의 자긍심과 같은 것은 없었다. 그래서 이 당시에 민족의식은 자리잡지 못했고, 생겨나질 못했던 것이다.
그 이후 백년전쟁을 거쳐 프랑스와 영국 모두 중세봉건국가에서 중앙집권적 국가로 바뀌게 되었다. 이로인해 민족의식이 생겨나게 되고, 서로다른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즉, 자신들만의, 자신들의 국가만의 의식이 자리잡은 것이다.

3. 백년전쟁 전개와 잔다르크에 대한 민족의식 변천

백년 전쟁은 보통 3기로 나눌 수 있다. 제 1기의 대표적인 사건이라면 크레시 전투와 푸아티에 전투를 들 수 있다. 영국군의 장궁 사용, 그것은 두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요소였다. 영국 장궁은 원래 웨일스 지방의 주 무기였으나, 웨일스 지방에 반란이 일어났을 때 진압하던 영국 왕이 장궁을 보고 주력무장으로 채택하게 됐다. 원래 궁수의 육성은 오래걸리지만, 장궁의 위력에 반한 영국 왕이 젠트리 - 요먼 계급에게 다른 오락거리를 금지하는 대신에 활쏘기를 장려하여 상당히 많은 궁수대를 백년전쟁에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 크레시와 푸아티에전투 당시 영국 장궁병들로 인해 프랑스군의 기사들은 돌격력이 떨어지게 되었고, 영국군에게 괴멸되게 된다. 이 패턴은 아쟁쿠르전투에서도 유지되었고, 그 때도 역시 영국군이 승리하게 된다. 이로 인해 기사 계급자체가 붕괴되어버릴 정도가 되었다. 장궁 하나로 이전 봉건사회에서 한 축을 담당하는 기사라는 계급을 몰락시켜버린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장궁은 봉건사회가 붕괴하는데 일조한 무기라고 할 수 있다.
제 2기는 전쟁의 휴식 기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2기 초기에는 프랑스가 분전하면서 유리하게 이끌어 나갔는데, 중간에 두 나라의 왕이 모두 다 죽으면서 미성년인 왕들이 즉위하게 된다. 거기다 영국 내부에서 전쟁 비용을 대기 위한 무거운 세금 징수 때문에 와트 타일러의 난이 일어나고, 미성년인 왕에 대한 귀족들의 반발까지 겹치면서 전쟁 자체가 중단되게 되었다. 프랑스의 내부에서도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냑파의 대립의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 때이다. 부르고뉴파는 제3기에서 잔 다르크를 영국군에게 1만 파운드를 받고 넘기게 된다.
제 3기의 대표적인 사건이라면 아쟁쿠르 전투와 잔 다르크의 등장을 들 수 있다. 제 3기 초반 영국은 아쟁쿠르 전투에서 크레시 전투와 같은 전술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북 프랑스를 거의 다 장악하게 된다. 이 상황에서 등장한 사람이 잔 다르크이다.
프랑스의 민족의식은 잔 다르크가 등장함으로서 프랑스 국민의 의식 속에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잔 다르크는 1412년 프랑스의 작은 마을 동레미에서 신앙심이 깊은 부농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부이자 마을에서 여러 가지 직책을 맡고 있던 자크 다르크, 어머니는 이자벨 로미이다. 그녀는 1424년 대천사 미카엘, 성 카타리나, 성 마거릿이 나타나 프랑스를 침략한 잉글랜드 군을 몰아내고 왕세자 샤를(후에 샤를 7세)을 왕위에 올리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계시를 받은 후 시농 성으로 가서 왕세자 샤를을 알현했다. 왕세자의 인정을 받은 잔 다르크는 이후 오를레앙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되고 이후의 몇몇 전투에서도 승리해서 전쟁의 판세를 뒤집는다.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잔다르크 항목에서 참조.
특히 잔 다르크의 최초 활약인 오를레앙 전투에선 하느님의 계시를 받은 성녀가 프랑스 군대와 함께 한다는 것과 더불어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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