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근대사] 아편전쟁 이후 근대(近代)를 맞이하는 중국의 구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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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근대사] 아편전쟁 이후 근대(近代)를 맞이하는 중국의 구 지식인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1. 아편전쟁을 통해 근대(近代)를 맞이하는 중국
2. 근대의 중국 구 지식인에게 무엇을 찾고자 하는가?

Ⅱ. 본론
1. 1840 아편전쟁 이후부터 19세기 말까지의 서양의 침략과 이에 대응하 는 양무운동에 대한 지식인의 입장
2. 근대에 대한 신지식인과 구지식인의 주요 논쟁
3. 노신에 문학작품에 나타난 근대를 맞이하는 구 지식인 공을기

Ⅲ. 결론- 흘러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구 지식인
본문내용

2)'자유‘개념을 둘러싼 지식인들의 논쟁 - 공(公)과 사(私)

19세기말, 서양에서 자유(liberty)개념이 처음 중국에 소개되었을 때, 중국의 지식인들 간에 자유의 이해와 수용에 관해서 논쟁이 벌어진다. 논쟁은 서유럽에서 유학하면서 계몽사상과 진화론을 학습한 사상가 엄복(嚴復, 1854~1921)에게서 시작되었다. 엄복은 청일전쟁을 통해 중국의 체제가 점차 붕괴되어 감을 목격하면서, 중국의 위기는 군사적 힘이나 과학기술의 낙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고 질서를 형성하는 기본적인 원칙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1895년, 엄복은 당 중기의 저명한 사상가인 한유(韓愈, 768~824)를 비판하는 벽한(闢韓)을 발표한다. 그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한유의 글 「원도」(原道)인데, 이 글은 노장사상과 불교를 비판하며, 유교의 인의 및 도덕을 높이 평가한 작품이다. 한유는 여기서 두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첫째, 자연상태의 인간은 약한 존재이므로 사회단계로의 전환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개개인의 욕망을 조절하여야 하며 사회의 혼란과 충돌을 조정할 능력있는 성인(聖人)이 필요하다는 것. 둘째, 이러한 성인은 군주 또는 스승의 역할을 갖게 되며 인민은 생산과 유통활동에 종사하며 그들의 지도자인 성인을 위해 인적, 물적인 면에서 의무적으로 봉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한유는 군주-신하-인민의 수직적 위계질서를 사회유지에 필수적인 요소로 여기고 있으며 역사 발전의 주체를 인민이 아닌 성인으로 보고 있다. 양일모, 「‘자유’를 둘러싼 유교적 담론」, 『철학연구』 제 52집, 철학연구회, 2001, pp. 22~3.

엄복은 한유의 관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첫째, 모든 생물은 생존을 위해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있으며, 이러한 능력은 인류의 진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수단이며 성인의 지도 및 도움은 필요가 없다. 둘째, 인민은 생산과 유통활동에 종사하므로 정치적 질서 유지에까지 관여하긴 어려우며 분업을 통해 후자의 역할을 담당할 인물(군주)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공명정대한 자를 임명하여야 하며 그는 인민의 생명, 재산을 보호할 의무를 지닌다. 요약하자면, 군주와 인민의 관계를 기존의 관점인 상하관계로 보지 않고 민(民)이 중심이 된 체제를 지향하였다.
엄복의 비판이 결코 군주제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것과는 판이한 정치질서관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유교적 질서에 충실한 지식인들의 비판을 피할 수는 없었다. 도인수는 「벽한」을 이단에 빠져있고 모순과 억측에 근거한다고 평가하였다. 그는 군신간의 위계질서는 하늘(天)이 부여한 영원한 것이며 엄복의 주장은 자연의 섭리에 어긋나며 사회혼란을 조장할수 있다고 비판하였다. 임춘성,마소조 공저, 「양무파와 유신파의 중체서용」,『중국학보』 제 52집, 한국중국학회, 2001, p.179.

엄복의 주장을 좀더 분석적으로 비판하며 자유의 개념에 대한 의견을 내놓은 사람은 양무파 관료 출신이자 대표적인 보수주의자인 장지동(張之洞)이다. 그는 개인의 사적이익 추구행위가 사회 혼란을 야기시킬 것이라고 보며 자유의 개념은 사(私)의 영역인 ‘개개인이 가진 자주적인 권리’가 아니라 공(公)의 영역인 ‘모든 일을 공도(公道)에 맞게 처리하여 다수에게 이익을 제공함’으로 정정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는 서양에서 기원한 민권론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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