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관리] 유일한의 생애

 1  [인사관리] 유일한의 생애-1
 2  [인사관리] 유일한의 생애-2
 3  [인사관리] 유일한의 생애-3
 4  [인사관리] 유일한의 생애-4
 5  [인사관리] 유일한의 생애-5
 6  [인사관리] 유일한의 생애-6
 7  [인사관리] 유일한의 생애-7
 8  [인사관리] 유일한의 생애-8
 9  [인사관리] 유일한의 생애-9
 10  [인사관리] 유일한의 생애-10
 11  [인사관리] 유일한의 생애-11
 12  [인사관리] 유일한의 생애-12
 13  [인사관리] 유일한의 생애-13
 14  [인사관리] 유일한의 생애-14
 15  [인사관리] 유일한의 생애-15
 16  [인사관리] 유일한의 생애-16
 17  [인사관리] 유일한의 생애-17
 18  [인사관리] 유일한의 생애-18
 19  [인사관리] 유일한의 생애-19
 20  [인사관리] 유일한의 생애-20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인사관리] 유일한의 생애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목차
1. 유일한의 생애

2. 유일한의 업적

3. 유일한의 기본정신

4. 유한양행의 버들표

5. 유한양행의 기업이념

6. 유한양행의 창설시 시대적 배경

7. 유한양행의 창설목적

8. 유한양행의 사업확장과정

9. 유한양행의 인적자원관리

10. 유일한의 평가와 시사점
본문내용
유일한은 나눔의 경영을 누구보다도 일찍이 실천한 인물이었다. 그는 1971년 세상을 떠나면서 유한양행 주식 14만941주를 기부하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재산을 남김없이 사회사업과 교육사업에 기부했다. 이를 종자돈으로 해서 설립된 유한재단과 유한학원은 2005년 말 현재 유한양행의 1대주주와 3대주주로 200만 주에 가까운 주식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 가치는 3000억 원에 육박하고 있다. 유한재단은 이 자금을 바탕으로 다양한 사회사업을 펼치고 있다.
1969년 유일한은 기업경영의 일선에서 은퇴하게 된다. 그는 이때 자신과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조권순(趙權順) 전무에게 사장직을 승계하여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한다. 그에게 미국 변호사로 활동하던 유능한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에게 경영권을 세습하지 않고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 것이다. 물론 소유도 자신이나 가족의 이름으로 한 것이 아니라 자선재단과 종업원, 그리고 국민의 이름으로 한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기업의 소유주는 사회다. 단지 그 관리를 개인이 할 뿐이다"라는 그의 기업관을 스스로 실천한 것이다.
유일한은 정경유착을 하지 않았고 납세의 의무를 철저히 지킨 경영자였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 아니냐고 반문할 이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1950년대와 1960년대의 기업풍토에서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시절의 많은 사업가들이 권력에 밀착해 이권을 따내고 부를 축적했지만 그는 역대 정권의 탄압과 유혹 속에서도 일절 정치자금을 내지 않았다.
그는 세금에 대해서도 철저했다. 세금을 탈루하는 것이 상식으로 통할 때에도 유일한은 그러지 않았다. '기업이 세금을 많이 납부해야 정부가 국민을 위해 예산을 사용할 수 있다'는 상식을 가진 그는 조금의 누락도 없이 세금을 납부했다. 정치자금을 내지 않았다는 것이 빌미가 되어 혹독한 세무조사를 수없이 받아야 했지만 한치의 어김도 없이 납세의 의무를 지켰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다. 1968년에는 3개월에 걸친 세무조사 끝에 어떤 혐의도 발견되지 않자, 오히려 모범 납세자로 선정되어 정부로부터 국내 최초로 동탑산업훈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유일한은 기업인으로서만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그는 그 어려운 시절 미국으로 건너가서 각고의 노력 끝에 기업가로서 몸을 일으켰으며, 사업가로서는 꿈도 꾸기 힘든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고, 나아가 나눔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그에게 기업은 목적이 아니라 나눔을 위한 수단이었다. 그는 평생에 걸쳐 자신의 가치판단 기준은 국가, 교육, 기업, 가정의 순서라고 강조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적 실천이 아닐 수 없다.
유일한은 1971년 3월 11일 76세로 운명하였다. 정부는 1971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였고 1995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3. 유일한의 기본정신
유일한 박사의 정신
유일한 박사는 금세기를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신상(紳商)으로 존경받았고, 지금도 추앙받고 있는 애국적 민족기업인이었습니다. 유 박사는 어린 몸으로 혼자 미국에 건너가 고학으로 대학까지 나왔고, 그곳에서 기업을 일으켜 성공적으로 이를 이끌어왔으며, 선배들을 도와 독립운동에도 가담한 굳은 의지의 청년이었습니다.
유 박사는 31세 되던 해 고국에 돌아와 유한양행을 창립하고 일본인들이 득세하고 있던 제약업계에서 그들과 대항하면서 성공을 거두었고, 후에는 학교를 설립하여 젊은 후진을 양성하였습니다. 그는 근면ㆍ성실, 그리고 민족을 사랑하는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평생을 일에만 몰두했고, 서거시에는 그의 기업ㆍ사재까지도 사회에 환원하고 간 현대 자본주의의 참정신을 몸소 실천한 문자 그대로 신상이었습니다.
유 박사의 기업이념은
'정성껏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 봉사하고, 정직ㆍ성실하고 양심적인 인재를 양성ㆍ배출하며, 기업이익은 첫째는 기업을 키워 일자리를 만들고, 둘째는 정직하게 납세하며,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