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영화사, 한국 영화사 비교 분석-남북한 영화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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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북한 영화사, 한국 영화사 비교 분석-남북한 영화약사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북한영화
북한영화의 정책과 이론
1.영화예술정책 2. 북한영화예술론

북한의 영화제작 실태
1. 북한영화촬영소 2. 북한영화 장르

북한영화 略史
1. 북한영화 원년 2. 북한영화 40년사

Ⅱ. 한국영화
한국무성영화( - 1935)
1. 한국영화 前史( - 1918) 2. 연쇄극시대(1919 - 1922)
3. 무성영화시대(1923 - 1935)

한국발성영화
1. 발성영화시대(1936 - 1945)
2. 한국영화 부활시대(1946년 - 55년)
3. 한국영화 중흥시대(1956년 - 65년)
4. 한국영화 국책시대(1966년 - 75년)
5. 한국영화 난국시대(1976년 - 85년)
6. 한국영화 변혁시대(1986년 - 현재)

본문내용
2) 무성영화 성장기(1926 - 1930)
이 시기는 한국영화의 첫번째 황금기라고 명명할 수 있다. 27년 한해 동안은 14편을 제작하여 해방전 최다 영화제작 기록을 남겼다. 무엇보다도 나운규의 “아리랑(26년)”이 상영된 사실은 영화사적으로 그 의의가 크다. 한국영화의 민족영화 태동으로 언급되는 “아리랑”은 종래의 한국영화가 열악한 여건에서 유치한 모방과 신파성을 극복하지 못한 점을 상기할 때 사실주의영화로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피폐한 농촌의 현실을 카메라에 담은 사실주의적 분위기는 일제에 억눌린 민족의 심리를 대변하기에 충분했다. 민족의식을 고취했다는 “아리랑”은 대흥행을 거두었을 뿐만아니라 한국영화산업의 개화기를 맞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영화미학적 차원에서 몽타쥬 수법을 도입한 것은 한국영화가 연극적 기법에서 벗어나 영화예술의 길을 내딛는 출발이었다. 그러나 의 제정공포는 무성영화의 전성기를 제약하는 악조건으로 28년부터 으로 강화되어 홍개명의 “혈마(28년)”는 상영금지된 최초의 작품이 되었다.
나운규는 을 창립하고 “잘있거라(27년)” 등 5편의 작품을 제작, 감독, 시나리오, 주연까지 그의 재능을 마음껏 과시하였다. 황운, 홍개명, 심훈, 김상진, 정기택 등 많은 감독들이 활동을 시작하였고 특히 카프계의 영화활동은 주목할 만한 영화이데오르기를 표방한다. 이 당시 만들어진 대다수의 영화들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소재를 바탕으로 통속적 오락성향이 강한 작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관객들을 많이 확보하기 위한 상업적 부담때문이긴 하지만 카프계의 영화인들은 이런 통속영화를 거부하고 그 당시 사회의 암울한 현실을 표현하고자 시도하였으나 사상검열의 지나친 탄압과 미숙한 아마츄어적 영화기술로 인해 대중들로부터 소외당한다. 김유영의 “유랑(28년)”, 강호의 “암로(29년)”등 불과 수편이 제작되었지만 카프영화의 논란은 무성영화 전성기를 쇠퇴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것은 한국영화의 제작방향을 영화검열로부터 회피하고자 하는 계몽영화로의 모색을 요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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