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문학사] 이해조 `자유종`, 1910년 이후의 작품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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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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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 차

Ⅰ. 들어가며


Ⅱ. 이해조의 삶과 시대적 배경

1. 이해조의 생애

2. 사회활동과 윤리의식

3. 소설가로서의 이해조

Ⅲ. 「자유종」 작품분석


1. 「자유종」의 형태와 주제
2. 「자유종」의 계몽적 성격

3. 토론체 소설의 형성과 특징

1) 개화기 토론체 소설의 형성 배경

2) 토론체 소설의 특징

알레고리 양식을 통한 문학적 형상화

권위적 담론의 활용

간접 화법의 변형

작가의 현실 대응 의지

3) 토론체 소설의 의의


Ⅳ. 1910년 이후 작품의 특징

1. 일상적 관심사로서의 사랑과 결합
2. 의도적 대립구도와 권선징악

3. 수동적 주인공과 자기 동일화

4. 독자 공감적 요소

1) 유형적 틀의 차용과 변개

2) 연속적 전환과 단절화

3) 서두의 장면화와 암시

Ⅴ. 문학사적 의의
Ⅵ. 마무리하며



본문내용
이 무렵은 항일 의병운동이 활발한 때로 이해조는 적극적으로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의 일환으로 결성된 광무사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11월 애국계몽단체 대한자강회의 후신으로 성립된 대한협회 교육부의 사무장으로 임명된다. 『대한자강회월보』, 9호(1907. 3. 25), 55~58쪽

1908년 2월 이해조는 신채호, 안국선과 함께 기호흥학회에 가입한다. 이 학회는 기호지방 출신자들의 학회로 결성된 것이었다. 그는 학회에서 평의원으로 참여하여, 학회의 기관지 『기호흥학회월보』에 윤리와 관련된 글을 몇 차례 싣기도 하였다. 『기호흥학회월보』, 5호~11호

이해조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제국신문사 입사를 전후한 시기였다. 1906년 잡지 『소년한반도』에 한문투 소설 「잠상태」를 발표함으로써 집필활동을 시작하였고, 이후 제국신문사 기자로서 주로 제국신문에 작품을 발표하였다. 제국신문 폐간 후에는 매일신보로 옮겨 계속해서 소설을 집필하고 신문에 발표하였다.
이해조는 개화기 작가 가운데 가장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현재까지 30편이 넘는 작품이 확인되어 있다. 그 과정에서 열재(悅齎), 또는 이열재(怡悅齎), 동농(東濃)라는 호를 사용하였고, 이밖에 선음자(善飮子), 하관생(遐觀生), 조춘자(措春子), 신안생(神眼生), 해관자(解觀子), 우산거사(牛山巨士) 등 많은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해조의 소설은 주로 제국신문, 매일신보 등 신문을 통해 발표하였으며, 초기에 쓴 몇 편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작품이 국문으로 씌어져 있다. 그는 1910년대 후반까지 창작활동을 계속하였으며, 1927년 59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2. 사회활동과 윤리의식

이해조가 의관의 자리를 떠나 언론계에 나선 시기는 1906년 잡지『소년한반도』에 소설「잠상태」를 발표하면서부터이다. 이듬해 그는 봉사사원으로 제국신문사에 입사하였는데, 당시 제국신문사의 사장은 이종일로, 그는 일찍부터 개화사상을 선호하였다.
1907년 그는 국채보상운동단체 광무사 설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광무사의 임시사부소는 제국신문사 내에 있었다. 이듬해 그가 참여하고 있던 대한자강회가 해산되고, 그 후신으로 대한협회가 성립되면서 교육부의 사무장으로 활동하게 된다. 대한협회의 목적은 교육의 보급, 산업 개발, 생명재산의 보호, 행정제도의 개선, 관민폐습의 교정, 근면저축의 실행, 권리, 의무, 책임, 복종의 사상을 고취하는 것이었다. 교육을 비롯하여 사회, 행정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개화계몽을 목적으로 삼은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해 이해조는 기호흥학회에도 가입하였다. 이 학회는 기호지방 출신자로 구성되어, 나라를 일으키기 위하여 교육을 실시하며 진흥시키고 성과를 얻을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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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영, 「이해조 소설 연구」, 연세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1995
양문규, 「1910년대 한국 소설 연구」, 연세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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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선, 「애국계몽기 이해조 소설의 담론 분석」, 부산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2004
최성윤, 「이해조의 에 나타나는 교육구국론의 의미와 한계」, 한국문학이론과 비평학회,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11집,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