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사] 식민지 경제의 성격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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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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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 차

Ⅰ. 서론

Ⅱ. 식민지 경제를 바라보는 입장
1. 식민지 근대화론
2. 식민지 수탈론
3. 일제강점기 주요 정책에 대한 각 이론의 입장
1)토지조사사업
2)산미증식계획
3)일제의 공업화 정책
4)1960년대의 공업발전과 연결지어
4. 각 이론의 한계와 비판

Ⅲ. 결론

본문내용
→ 식민지 수탈론
산미증식계획에 대한 연구는 1970년대에 이르러 그 성과가 축적되기 시작했다. 원형윤, 위의 글, 2010
당시 연구를 통하여 산미증식계획 실시의 목적이 일본의 식량부족문제 해결에 있었고, 중일전쟁 이후 전시체제로 인해 조선 내부의 식량 수급사정이 악화되었고, 실행과정에서 상품경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일본인 지주는 고율의 소작료 등을 통해 지주제적 지배를 강화한 반면, 이에 적응하지 못한 조선인 지주는 몰락하였다는 점이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은 조선과 일본 모두에서 풍작이었지만 1939년 일어난 한해 1939년 일어난 한해는 유래없는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이 한해는 경기도 이남 7도에 피해를 주었으며 수확이 전무하거나 70%이상 감소한 면적이 69만 3천정보, 미곡의 감수는 평년에 비하여 900여만석, 피해금액은 2억 358만원, 논농사의 70%이상 가무소 이재된 호수는 109만여호에 이르렀다.(조선경제연보, 1941·1942, 59쪽)
는 이후 조선 내부에서의 식량사정과 일제의 농업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 내부는 1937년 대풍작을 2600만석의 최고생산량을 보였지만 1939년 대한해의 발생으로 생산량이 급감하였다. 이후 일제는 다양한 생산증강정책을 시도하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반면 조선 내부에서의 미곡 소비량은 꾸준히 늘어나다가 산미증식계획이 시작되면서 격감하는 모습을 보인다. 근대화론 주장자들은 미곡 소비량이 줄어들었어도 잡곡등 기타 음식으로 1인당 열량섭취를 유지한다고 주장하지만 1인당 잡곡소비량도 1937년 0.9289석에서 1944년에는 0.6833석으로 감소하는 추세를 보인다. 이송순, 식민지 조선경제의 종말, 398쪽 표 3-23참고, 신서원, 2000


산미증식계획은 조선 농촌의 자치성도 붕괴시켰다. 당시 조선의 농촌산업 단체는 지주의 대표기관인 계통농회 조직, 조선금융조합연합회를 중심으로 하는 계통금융조합 조직, 산업조합조직 등이 있었고 이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금융조합과 농회였다. 농회는 1933년 축산동업조합연합회를 합병하여 그 기능이 더욱 강화되어 갔지만, 기존 농촌 3단체 간에 영역이 중복되고 1938년 대한해로 농업생산과 유통과정에 어려움이 생기자 3단체에 대한 조정문제가 대두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후 일제는 강력한 통제정책을 실시했는데 총독부는 전시하 농업부문의 갈력한 관제단체인 농회에 농산물의 생산·집하·배급 통제 일부를 분담시켰지만 농회는 공출량을 직접 할당하지는 않았다. 이는 공출량 할당에 있어 최소한의 '자율'도 인정하지 않은 식민통치의 일환이었다. 또한 금융조합은 조선농민, 중소산업자의 영세자금을 모아 일제의 전쟁수행 자금으로 조달하였는데 이 자금은 저축을 강행하고 대출을 줄이면서 생긴 것이다. 이렇게 조선의 농촌단체는 농회와 금융조합의 2원체제를 유지하였다. 금융조합의 경우 해방이후에도 계속 유지되어 현재의 '농협'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김광신, 「한국 독점자본의 농업지배에 있어서 농협의 역할에 관한 연구」, 고려대 사회학과 석사논문, 1989,
같은 책에서 재인용
이런 과정 속에서 조선의 농촌단체는 농민자치단체로서의 성격이 완전히 사라졌다. 일반적으로 농업협동단체는 농산물의 유통과정에서 중간착
참고문헌
참고문헌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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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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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기사-
(5)식민지 근대화론의 올바른 이해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26827
안병직 교수 제자의 '식민지 근대화론'비판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7/02/12/200702120500030/200702120500030_1.html
[JERI 리포트] 일제 식민지 근대화론 vs 수탈론,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ctg=11&Total_ID=169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