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 답사] `영천 조양각, 도계서원, 임고서원`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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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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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 차

Ⅰ. 찾아가는 길
1. 답사지 선정이유
2. 답사 사전 준비
3. 답사 일정

Ⅱ. 들어가는 길
1. 답사 활동
1.1 찾아가는 방법
1.2 답사 경로 및 소요비용

2. 정몽주의 꿈이 깃든 ‘영천 조양각’

3. 노계 박인로
3.1 박인로의 둥지 ‘도계서원’
3.2 박노계집판목

4. 임고서원

Ⅲ. 돌아오는 길
1. 답사 소감
2. 참고자료
본문내용
2. 정몽주의 꿈이 깃든 ‘영천 조양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44호인 조양각은, 경북 영천시 창구동 1-1에 소재하고 있다.
조양각이 있는 조양공원에는 ‘조선통신사의 길’표지석과 백신애 문학비 등이 산재해 있으며, 영천의 역사를 한 눈에 수많은 흔적을 만나 볼 수가 있다.
명원루 혹은 서세루라고 불리는 조양각은 고려 공민왕 17년(1368)에 정몽주 선생이 당시 부사이던 이용, 그리고 향내 유림들과 합심하여 지은 건물로서 영남 7루의 하나다.
원래 조양각을 중심으로 좌우에 청량당과 쌍청당 등, 여러 개의 건물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었다고 한다. 현재 조양각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되어있으며, 이 고장을 거쳐 간 수많은 명현, 풍류객들의 시구가 조각된 80여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조양각 경내에는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애국충정을 기리는 산남의진비와 영천지구 전승비, 백신애 문학비와 황성옛터 노래비 등의 기념물이 있다. 루 안에는 기문 15편과 시 63편이 목판으로 새겨져 걸려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포은의 시 을 비롯하여 율곡 이이, 노계 박인로, 태재 유방선 그리고 루를 축조한 이용 등 명현들의 시가 있어 풍류를 더한다.

3. 노계 박인로

가사문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조선 중기 무신 겸 시인.
박인로(1561∼1642)의 자(字)는 덕옹(德翁), 호(號)는 노계·무하옹(無何翁),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이며, 영천 출신이다.
그는 정철,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時歌人)으로 꼽힌다. 문학사에 가장 많은 9편의 가사를 남겼고 시조 67수, 한시 110수를 남겼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에 가담해 왜적과 맞서 싸우기도 했다. 그가 최초로 지은 가사인 ‘태평사’는 가장 태평하지 않은 시절에 지어진 가사다. 백의종군하여 부산에서 수병(水兵)으로 근무하던 시절에 상관인 성윤문의 요청으로 병사들을 위무하기 위해서 지은 글이다. 이 ‘태평사’는 무하옹이 45세에 통주사가 되어 지은 ‘선상탄’과 함께 우리 국문학의 지평을 넓혀놓은 수작으로 꼽힌다.
어려서부터 시문에 뛰어났으며 도학과 애국, 자연을 사랑하는 것을 사상적 바탕으로 하여 전쟁 중에도 시정과 구국충정이 넘치는 작품을 많이 남겼고, 가사문학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노계 박인로가 살았던 명종 인조시대는 조선 전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기였다.
거듭되는 사화와 당쟁 속에서 국력은 날로 쇠퇴해졌고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결국 임진왜란이라는 수난을 겪으면서 조선의 역사는 이를 계기로 전후로 시대구분을 할 만큼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 시기에 양반들의 허위와 무능이 드러나고 무지했던 서민들이 각성하여 서민의식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또한 일부 양반들은 서민과 다름없는 잔반으로 몰락하여 신분체제가 와해되는 등 국내외적으로 매우 혼란했던 시기였다.
임,병 양란의 참담한 현실을 체험한 노계는 매우 빈궁한 생활 가운데서도 많은 가사와 시조, 한시 작품을 남겼다. 노계가사는 전기 양반가사적 요소가 지배적이지만 임,병 양란후 특히 7편의 가사에는 혼란스러웠던 시대적 상황과 삶의 태도가 잘 반영되어 있으며, 부분적으로 전기 양반가사적 요소와 후기 서민가사적 요소가 공존하고 있다.
그는 전쟁 중인 1599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을 역임하고, 거제도 조라포에서 만호 벼슬을 한다.
하지만 덩치가 왜소하고, 글 읽기를 좋아하는 선비일 뿐, 용맹한 장수가 될 뜻은 없었던 모양이다.
전쟁터에 달려 나가 칼을 잡은 것은 위태로운 나라에 대한 우국충정이었을 뿐이다. 이렇게 그의 진면목은 고통스런 현실의 한복판에서 이를 외면하지 않고 온몸으로 맞서 견뎠다는 데 있다. 그랬기에 박진감 넘치고 가슴 시린 삶의 편린들을 글로 형상화 할 수 있었다고 본다.
이쯤 되니 박인로는 국문학사에서 독특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정철이나 윤선도처럼 중앙 정계에 나아가 왕을 가까이 모신 적도 없고, 사림에 속하지도 않았다. 당대의 주류문화에서 벗어난 군인으로 나라의 녹을 얼마간 먹었고, 가문과 학연으로 얽힌 조선 사회에서 집안은 보잘 것 없고 학맥은 찾을 길 없었다. 훌륭한 스승을 받들지도, 똑똑한 제자를 두지도 못했다. 스스로 문집을 엮지도 않았고, 당
참고문헌

2. 참고자료

·영천시청 홈페이지 http://www.yc.go.kr
·「허정구의 이야기 여행」 - 경북 영천의 ‘도계서원’
·문화저널21-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선구자 박인로 편
·최영희, 2003 노계 박인로의 시문학 연구/ 세종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김기성, 2001 박인로의연구/ 국민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조동일,『한국문학통사3』(3판), 지식산업사(1994)
·민족문학사연구소 고전문학분과,『한국 고전문학 작가론』, 소명출판사(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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