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통해 돌아보는 인천과 현재, 그리고 미래의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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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역사를 통해 돌아보는 인천과 현재, 그리고 미래의 인천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 인천의 발자취
〓 격동하는 사회경제적 중심에 위치한 인천
- 교역의 중심
- 변화의 중심
- 정치, 외교, 군사 활동의 중심지
- 시련의 중심
- 육상, 해상교통의 선구적인 개척지
- 발전의 중심
〓 고인돌에 깃든 문화
〓 미추홀왕국과 탄생과 삼국의 패권 다툼
- 인천 역사의 태동 “미추홀”
- 미추홀왕국의 상징 “문학산성”
- 한강하류의 방어 요충지 “계양산성”
- 인천을 둘러 싼 삼국의 패권 다툼
〓 고려왕실과 인천
- ‘7대어향’ 인천
〓 조선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인천
- 인천 지명의 유래와 지방제도
- 인천의 생활 및 사회시설
- 서양세력의 침입과 인천지역의 항전
- 병인양요, 신미양요
- 인천 도호부 청사 답사
〓 변화와 격동의 서막
- 1876년 강화도 조약이후 개항시대(1876 ~ 1910)
- 일제강점기 시대(1910 ~ 1945)
- 6. 25 전쟁 이전과 6.25 전쟁(1945 ~ 1950)
- 경제개발시기 (1954 ~ 1981)
〓 미래를 위해 달리다
- 지속적인 개발과 성장
- 인천발전의 미래 : 중국의 개방화 정책
- 인천발전의 리스크
〓 인천 안의 중국, 차이나타운
〓 나에게 인천이란?
〓 정치변두리 인천!?
- 인천시민들은 정치에 무관심하다?
〓 인천의 정체성을 찾아서

본문내용
인천의 발자취

물은 생명의 기원이자 인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물로 둘러싸인 성'을 뜻하는 '미추홀'이란 옛 이름을 간직한 인천에서 우리 역사의 수많은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것도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인천은 백제를 세운 비류(沸流)가 고구려로부터 남하하여 미추홀에 나라를 세우면서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후 매소홀, 소성현, 경원군, 인주, 경원부 등의 이름을 거쳐 조선시대 태종 13년(1413)에 비로소 현재의 이름인 '인천'으로 바뀌게 되었다.

국토 전체에서 보는 인천의 위치는 한반도의 한 가운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황해에 접하여 있고 한강의 하류에 위치하여 역사적으로도 대단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나라의 지리적 위치로 보아 인천은 남쪽과 북쪽의 중간지대이며, 또한 우리나라 문화형성으로 보아 북방과 남방의 중간지대로서 가장 먼저 근대사를 맞이한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곧 인천이 서양의 문물이 이 고장을 통하여 전국에 전파하게 되었으며, 또한 우리나라의 문물이 이 고장을 통하여 세계로 뻗어나가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인천은 한국근대사의 산실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지정학적으로는 동북아의 중심도시로서 향후 대한민국이 세계로 뻗어 나갈 요충지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인천은 서해안의 경기만에 위치하고 북쪽으로는 한강하류 유역과 황해도 옹진반도의 장연군에 접하며, 동쪽으로는 서울시 강서구 및 경기도 김포군 고천면과 접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충청남도 서산군, 당진군과 접하고 있는 전국 최대의 행정구역 면적을 가진 광역시로서 강화 옹진군을 포함한 전체 면적이 955.00km2 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 중부지방의 지형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나아가면서 살펴보면 동고서저인 경동지형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인천은 가장 낮은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지형적인 특색은 황해의 영향이 크다. 인천의 산지는 높지는 않으나 해변에 접근해 있기 때문에 평야의 발달도 적고 산지와 산지사이의 저지대는 대부분 만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지형조건은 인천지방의 자연 및 인문경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선사시대, 특히 청동기시대부터 이미 인천은 한반도 서해안 지역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삼국시대 이전의 인천의 지명은 알려져 있지 않고, 삼국시대부터 걸쳐 여러 번에 걸쳐 지명의 변천이 이루어졌다.

삼국시대에 있어 인천의 백제 때의 지명은 미추홀이고, 고구려 때의 지명은 매소홀이었다. 그리고 당시 인천은 군 또는 현의 위격이었으나 인구가 어느 정도였는지, 영역의 넓이가 어떠하였는지는 밝힐 수가 없었다.

통일신라시대 인천의 명칭은 경덕왕 때 소성현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소성현으로 변경된 이유에 대해서는 그 근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그 뜻을 ‘높은 성’ 혹은 ‘거친 성’이라 보고 이를 문학산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하여, 현재의 문학산 주변이 소성현이었을 것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고려시대 인천의 지명 변천은 3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숙종 때 경원군으로의 관호 승격(읍호의 승격은 말 그대로 읍호만의 승격, 그러나 관호의 승격은 외관 설치 동반)이다. 고려 왕실과 인주 이씨 가문과의 결혼으로 문종의 비이며 숙종의 어머니인 인예왕후의 내향이 되므로 경원군으로 승격된 것이다. 여기서 경원으로 관호를 승격한 이유가 왕비의 내향임을 하례한다는 이유에서였음을 알 수 있었다(이후 이자겸의 난으로 한 때 강등되었다고 하는 의견도 있으나, 그 증거는 찾지 못하였다). 두 번째로, 인종 때 그의 어머니 순덕왕후의 내향이라 하여 인주로 승격되었는데, 인주라는 명칭은 문종의 왕후와 비인 인예왕후·인경현비·인절현비의 ‘인’자를 차용하여 사용한 것으로 이해가 된다. 인주는 공양왕 때 ‘7대어향’이기 때문에 경원부로 승격이 된다. 이는 문종부터 인종까지의 7대 80년 동안 인주 이씨에서 왕후가 나온 것에서 비롯되었다.

참고문헌
- 서적
강석화, .
박흥렬, .
우쾌제, .
윤경진, .
인천광역시사편찬위원회, .
최원식, .
.

- 인터넷 & 신문
인천광역시 홈페이지
네이버 백과사전
위키백과
인천문화원 김봉수 사무국장 인터뷰 참조
연합뉴스 2003.10.03. 2005.05.02. 2009.0830 참조
2012.05.17. 시민일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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