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시장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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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의 시장문화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1)상고시대
(2)삼국시대
(3)고려시대
2.
3.
(4)조선시대
4.
5.
6.
(5)일제강점기
(6) 현대
본문내용


(1)상고시대
최초의 시장은 《삼국사기》에 나온 490년(신라 소지왕 12)에 신라의 수도였던 경상북도 경주에서 열린 경사시(京師市)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신라의 서울인 경주에 세워진 최초의 관설시장을 뜻하는 것이지 우리 나라 시장의 효시를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제사가 거행되는 제단 부근에는 으레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자연스럽게 물자와 정보가 교환되었을 것이기 때문이고 이를 제전시(祭典市)라고 한다. 따라서, 단군시대부터 신시(神市)와 같은 제단 부근에 장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삼한시대에는 70여 개의 마을 사이에서 열렸을 경계시, 정치와 사회생활의 중심지에서 섰을 성읍시, 또는 가로시 외에 외지와의 교통요충지에 비정기적이긴 해도 국제시장이 발달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2)삼국시대
신라 509년(지증왕 10) 동시(東市)를 설치하고 시전(市典)을 두어 시장감독관청을 설치했다.
이후에 695년(효소왕 4)에 서 및 남의 두 시전이 추가로 설치되었다. 주로 시장개폐의 시각, 도량형의 사용, 분쟁의 조정, 어용품의 조달, 조세의 징수, 잉여생산물의 판매, 물가변동의 감시 등을 관장하였다. 당시의 시장은 부근 촌락에서 주로 여자가 생산물을 가지고 와서 서로 생산물을 교환하였는데, 여자가 많이 모인 까닭은 당시 국내교통이 불편하여 남자는 주로 수렵·운반 등 힘든 일만 맡고 여자가 농경이나 교역에 종사하였기 때문이다.
백제 국도인 고마성(固麻城)에는 신라의 경시와 같은 관설시장이 있어서 그곳의 삼시전과 비슷한 기능을 가지는 도시부(都市部)로 하여금 관장하게 하였다고 한다. 백제는 또한 중국이나 일본과도 긴밀한 교역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해상교통이 편리한 지역에 일종의 국제시장이 열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3)고려시대
신라시대와 큰 차이가 없었으며, 상설 전포 없이 모두 시장에서 물물교환을 주로 하였다. 신라와 발해의 뒤를 이어 고려가 들어선 이후에도 시장발달을 촉진하는 환경적 요인의 획기적 변화는 없었던 듯하다. 소농과 수공업적 소생산을 주축으로 하는 전래된 경제구조의 낮은 생산성을 제고시킬 수 있는 계기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생산물의 상품으로의 전화(轉化)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민리(民利)를 위하여 상업이 장려되고 이를 위하여 주점과 원(院) 그리고 객관 등이 설치되기도 하였으나, 상업은 말업에 지나지 않았고 상인은 천시되었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상인들은 ‘누에를 치지도 않고 비단옷을 입으며(不蠶而衣帛)’, ‘지극히 천하면서도 맛있는 음식을 먹는(至賤而玉食)’ 놀고 먹는 무리들로 인식되고 있었다.

태조 왕건(王建)은 고려를 세운 다음해 이른 봄, 송악(松嶽:지금의 개성)에 수도를 정하고, 한편으로는 궁궐을 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시전을 세우고, 또 방(坊)과 이(里)를 구분하였는데 ‘방’은 상인들의 거리이고 ‘이’는 일반인들의 거주지역이었다. 방시의 상인들은 국가로부터 시전건물을 대여받고 일정한 사용료를 지불하며 국가가 요구하는 물자를 조달함으로써 특권상인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시전상인의 특권이 제도화되면 시장의 자유롭고 활기찬 발달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시전의 관리와 감독을 위해서는 경시서(京市署)가 설치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