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유학의 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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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본유학의 정치사상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시대적 상황
1. 도쿠가와 막부시대 전후 시대적 상황

Ⅲ. 주자학의 전래와 수용
1. 주자학의 전래
2. 주자학에 대한 비판적 입장

Ⅳ. 日本주자학의 이론 전개와 퇴계학의 영향
1. 주자학(퇴계학)의 영향으로써의 전개 과정
2. 주자학(퇴계학)에 대한 비판으로써의 전개 과정
3. 퇴계학과 메이지 유신

Ⅴ.결 어

Ⅵ.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들어가는말
일본의 최초 정부라 할 수 있는 야마토 정권이 4세기에 천황을 중심으로 세워졌다. 하지만 국유지가 점차 귀족들의 사유지가 되어갔고 법과 질서는 혼란스러워졌다. 이에 각 지방에서는 치안을 명분으로 다이묘를 비롯한 무사계급이 성장하였으며 군사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던 쇼군의 지위가 매우 높아졌다. 12세기 후반 결국 미나모토 요리토모에 의해 가마쿠라 막부가 세워졌다. 군사 사령 본부로 시작한 막부는 점차 국가의 군사, 행정, 조세, 법체계를 비롯한 전 영역에 지배적인 권한을 행사했다. 12세기 말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진 이후 무로마치 막부가 등장했다. 무로마치 막부는 쇼군 옹립을 둘러싼 갈등과 전쟁, 다이묘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감에 따라 점차 쇠락의 길을 걸었다. 이로 인해 15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초까지 사회적, 정치적 변동 및 내란이 계속 되었는데 이 당시를 전국시대라 한다.전국시대는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종식되고 에도 막부가 세워진다.
막부시대 이후로 일본은 무인들은 사무라이라는 중심 지배계급을 형성했는데, 이는 동시대의 중국과 일본이 문인들이 권력의 중심이었던 것과는 달랐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전국시대는 이런 무인중심의 사회에서 일어났기에 그 혼란의 정도가 더욱 심했을 것이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가 당시 쇼군을 몰아냈지만 모반에 의해 몰락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잠시 정권을 잡아 권력 안정화를 위해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이 전쟁을 통해 일본에 많은 서적들과 함께 주자학朱子學·퇴계학退溪學이 유입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실각 후 세워진 도쿠가와 정부에 의해 관학으로 자리잡는다. 여기서 우리는 무인중심사회였던 일본이 어째서 당시 유교사상의 정수精髓라 할 수 있는 주자학이 관학으로 채택했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이렇게 유입된 퇴계학이 이후 일본 유학에 어떠한 영향들을 미쳤는가에 대해서도 살펴보려고 한다.

Ⅱ. 시대적 상황
1. 도쿠가와 막부시대 전후 시대적 상황
에도막부 초기의 시대상황
전국시대 후기 일본은 광대한 토지를 차지하고 세력을 떨치던 지배자들에 의한 적나라한 폭력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사무라이들로 이루어진 다이묘 조직들 간의 전국을 무대로 한 살육전은 오사카전투를 마지막으로 도쿠가와가의 에도막부가 열리며 최종적인 결착을 보았다. 일본 중부지방에서 성장한 다이묘에 불과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국 통일 사업을 추진하고 완성시킨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뒤를 이어서 일본 전국을 지배하는 군사정권을 에도에 개창했다. 대대로 도쿠가와씨가 쇼군을 세습한 결과로 도쿠가와 막부라고도 부른다.
당시 일본의 지배층은 예로부터 문화적 경외의 대상이었던 중국 성인의 가르침에 막연한 경의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하극상을 통해 지위를 높여온 전국시대 이래로의 다이묘들의 실제 행동양식과 문화는 유학⋅유교사상과 거리가 멀었다. 운명으로써, 또는 인과응보를 부여하는 것으로써 여러 종교⋅교학을 절충한 ‘천도天道’라는 관념이 퍼져있기는 했으나, 유교적 이념과 이론으로서의 것은 아니었다. 그들 다이묘의 부하들 역시 전쟁에서의 공명을 얻기 위해 전투에만 애를 썼다. 그들은 ‘무예武藝’야 말로 사무라이를 사무라이답게 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주군의 명령에 따라 상해와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그들의 삶과 정신세계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공명을 증명하기 위해, 살해한 적敵의 머리를 잘라 본진으로 가져오는 풍습을 갖고 있었다. 후에 본문에서 다룰 근세 일본의 대표적 유학자 오규 소라이는 “전국시대의 신분이 낮은 무사는 오늘날 솔개를 담당하는 직인과 같은 자들입니다. (그들을 이끌고 있는) 대장은 사람을 먹는 개와 같은 자들입니다.”라고 평한다.
이와 같은 사회상은 전쟁의 종언에도 불구하고, 이후 250년간 태평세월이 지속되리라는 것을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사회분위기를 낳았다. 오히려 다시 다가올 전쟁에 대한 대기태세를 유지하는 기운만이 사회에 있었다. 에도막부 초기는 ‘우연히 전란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끝없이 지속되는 상황’이었다. 막부 체제에 들어서도 전국 시대의 모습이 전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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