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보고서] 해미읍성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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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답사보고서] 해미읍성을 다녀와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이 성은 조선 태종 18년(1418)에 충정도 병마절도사영성(兵馬節度使營城)으로 축조하여 세종 3년(1421)부터 충청도 육군의 본영(本營)으로 사용되다 효종3년(1652)청주로 이설된 이후에는 해미읍성으로 이용된 유서(由緖) 깊은 유적이다.
성의 둘레는 1,498m로 북쪽은 낮은 구릉질 끼고 넓은 평지를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성벽의 아래 부분은 큰 석재(石材)를 사용하였고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쌓았다. 성문은 동,서,남,북 4곳에 있는데, 네모지게 잘 다듬은 무사석(武砂石)으로 쌓았으며, 주 출입구인 남문은 아치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문과 서문사이에는 적이 성벽으로 기어오르는 것을 막기 위하여 성벽에서 밖으로 돌출시켜 설치한 2개소의 포루(鋪樓)가 축조되어 있으며, 성안의 물을 밖으로 유출시키기 위한 수구(水口)가 서문 바로 남쪽에 시설되어 있다. 성벽 바깥으로 깊은 해자(도랑)을 팠던 자국이 남아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성벽과 해자(도랑)사이에 탱자나무를 심어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여 탱자성(枳木城)이라 불리기도 했다. 성안에서는 고종 3년(1866)에 천주교를 탄압하면서 교도를 천 여명을 처형했던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성은 본디 왜구를 막기 위하여 쌓은 것으로 몇 차례에 걸쳐 수축하였는데,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성곽연구에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안내문에서도 설명하는 것처럼 해미읍성은 조선의 역사를 만날 수 있는 역사체험장이다. 사적 제116호로 지정된 해미읍성은 조선시대 축성된 읍성 중 원형보존이 전국에 있는 성중에서 가장 잘된 5백년 풍파를 이겨온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태종7년(1407)충청도 감사가 겸임하는 공주와 인근 에산군 덕산면에 두었던 병마절도영등 2개의 충청지역 병마절도영 중 덕산 병영을 태종 18년(1418) 이곳으로 옮긴 뒤 축성을 시작하여 세종 3년(1421)에 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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