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와 왜의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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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백제와 왜의 교류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서론-백제에 대해서
(1)한성시대
(2)웅진시대
(3)사비시대
⓵사비천도와 국가체제 정비 - 성왕대
⓶귀족중심의 정치운영 - 위덕왕~법왕대
⓷왕권중심 체제의 재획립 - 무왕·의자왕대
2.본론-백제와 왜의 교류-백제는 일본 고대문화 형성의 주역
⓵학문과 사상
⓶불교문화의 전래
☞사찰의 배치
☞백제의 기와
☞불상의 전파
⓷유물
☞청동거울
☞칠지도
3.맺음말
본문내용
1.백제란 어떤 곳인가?
기원 전후한 시기에 마한의 소국으로 출발하여 한반도 중부와 남서부를 차지하고 고구려, 신라와 삼국을 이루었다. 일본 등과 우호관계를 유지하여 일본의 문화에 영향을 끼쳤고,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했다. 백제는 수도의 위치에 따른 3시기로 분류 한다

(1)한성시대
백제의 건국자인 온조는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아들이다. 주몽은 북부여에서 도망하여 졸본지역에 정착한 후 졸본 부여왕의 둘째 딸과 결혼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 주몽은 북부여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이 되었는데 얼마 후 그가 북부여에 있을 때 맞이한 부인 예씨의 소생인 유리가 찾아오자 태자로 삼았다. 유리가 태자가 됨으로써 왕위를 계승할 수 없게 된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염려되어 형 비류와 함께 오간(烏干)·마려(馬黎)등 10명의 신하를 거느리고 남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형제는 갈라져서 비류는 미추홀(지금의 인천)에 정착하였고, 온조는 하북위례성(河北慰禮 : 지금의 서울시 중랑구 일대)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십제가 건국될 당시 경기도 지역은 마한의 권역이었다. 이 마한은 54개의 소국들로 구성된 연맹체였으며 목지국(目支國 : 충청남도 직산)이 맹주국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온조는 목지국의 용인하에서 십제를 세웠기 때문에 건국 후 십제는 마한연맹체의 한 구성원이 되었다.
한강유역은 서북한 지역과 동북한 지역으로 전파되어 온 문화가 복합되는 곳이며 땅이 비옥하여 물산이 풍부한 곳이었다. 한강유역이 갖는 이러한 경제적 기반과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정치적 성장을 이룩한 십제는 초고왕(166~214)대에 하북위례성에서 하남위례성(오늘의 풍납토성)으로 중심지를 옮겼다. 하남위례성은 북으로는 한강을 띠처럼 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어서 지리적 이점과 경제적 이점을 갖춘 곳이었다. 이곳으로 중심지를 옮긴 십제는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치고, 미추홀에 자리한 비류세력도 흡수하여 한강유역의 새로운 세력으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3세기 중엽 경에 와서 만한과 중국의 군현인 대방군(帶方郡), 낙랑군(樂浪郡)은 진한(辰韓) 8국을 분할하는 문제로 전쟁을 하게 되었다. 목지국이 주동이 된 마한은 대방군을 공격하여 태수를 전사시키는 등의 전과를 올렸으나 끝내는 군현세력에 패배하여 나혜국을 비롯한 수십국이 연맹체를 이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써 맹주국인 목지국의 위상이 흔들리게 되었다.
참고문헌
부여군/『백제의 고도 부여-그 역사와 문화의 발자취』/꿈이있는집/1998
김현구/『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창비/2010
조법종/『이야기 한국사』/청아출판사/2008
한국박물관연구회/『한국의 박물관』/문예마당/1999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83372&mobile&categoryId=1374#)
“청동인물화상경”/독서신문/2010.08.18.

趙源昌/“百濟 瓦博士의 對新羅·倭 派遣과 製瓦術의 傳播”/韓國上古史學報.제48호 (2005. 5)/pp.85-108
주보돈/“百濟 七支刀의 의미”/한국고대사연구 제62집 (2011년 6월)/pp.253-294
최찬묵/“七支刀와 4세기 百濟의 對倭關係 硏究”/학위논문(석사)/2005
문명대/“韓國彫刻史”/悅話堂/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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