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통속연의 1회 2회

 1  당사통속연의 1회 2회-1
 2  당사통속연의 1회 2회-2
 3  당사통속연의 1회 2회-3
 4  당사통속연의 1회 2회-4
 5  당사통속연의 1회 2회-5
 6  당사통속연의 1회 2회-6
 7  당사통속연의 1회 2회-7
 8  당사통속연의 1회 2회-8
 9  당사통속연의 1회 2회-9
 10  당사통속연의 1회 2회-10
 11  당사통속연의 1회 2회-11
 12  당사통속연의 1회 2회-12
 13  당사통속연의 1회 2회-13
 14  당사통속연의 1회 2회-14
 15  당사통속연의 1회 2회-15
 16  당사통속연의 1회 2회-16
 17  당사통속연의 1회 2회-17
 18  당사통속연의 1회 2회-18
 19  당사통속연의 1회 2회-19
 20  당사통속연의 1회 2회-20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당사통속연의 1회 2회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당사통속연의 1회 용흥[황제의 시조]을 거슬러 올라 편을 시작하며 장군의 종자를 말하며 미인을 선택하여 잔치에서 모셔 당공[이연]을  속이다.
당사통속연의 2회 비밀계책을 결정하여 유인하여 부유수를 죽이고 이연은 외부 도움의 연합으로 스스로 대장군이라고 호칭하다
본문내용
桑麻無恙, ?犬不驚, 村夫野老 野老 [y?l?o]:1) 시골에 사는 늙은이 2) 거칠고 촌스러우며 예의를 모르는 노인 3) 노인 자신의 겸칭
, 散坐瓜棚 棚(시렁, 선반 붕; ?-총12획; pe?ng,pe?ng)
豆架旁, 笑談大唐遺事 ?事 [y?sh?]:1) 죽은 사람이 남긴 事跡 2) 전해 내려오는 사적
, 什?晉陽宮 이연에게 거병(擧兵)을 촉구한 이는 그의 둘째 아들 이세민이었다. 이세민은 진양궁감(晉陽宮監) 배적(裴寂)을 내세워 아버지 이연을 회유했다.
, 什?鳳凰山 당 태종 이세민은 봉황산(鳳凰山)에서 연개소문에게 쫓겨 도망간다. 오골산성은 鳳凰山에 있는데둘레 15,955m 고구려 요동지방의 중심 성으로 최고 지방관인 욕살(褥薩)이 파견된 대성(大城)의 하나.
, 什?摩天嶺, 什?薛仁貴설인귀 614~ 683. 강주(絳州) 용문(龍門:지금의 산시 성[山西省] 지산 현[稗山縣]) 사람이다. 645년(보장왕 4)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군졸로 응모(應募), 안시성 공방전에서 공을 세워 유격장군(遊擊將軍)으로 발탁되었다. 658년 우령군중랑장(右領軍中郞將)으로 임명되어 고구려 원정에 나섰으며, 이듬해 횡산(橫山)에서 고구려군에게 패했다. 666년(보장왕 25)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죽고 그 장남 남생(男生)이 아우 남건(男建)·남산(男産)에게 쫓겨 당나라에 와서 원병을 청하자,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으로 요동안무대사(遼東安撫大使) 계필하력(契苾何力)을 도와 다시 고구려를 침략했다. 그는 남건의 군사를 격파하고 남소(南蘇)·목저(木底)·창암(蒼巖) 등 3성을 함락시켰다. 668년 부여성·평양성을 함락,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가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자, 그는 검교안동도호(檢校安東都護)로 취임했다. 671년(신라 문무왕 11) 계림도행군총관(鷄林道行軍總管)으로 신라를 침입했으며, 675년 신라의 천성(泉城)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듬해 다시 침략했으나 소부리(所夫里)의 기벌포(伎伐浦)에서 패했다. 681년 과주자사(瓜州刺史)·대주도독(代州都督)으로 임명되었으며, 다음해 돌궐을 격파했다. 뒤에 본위대장군(本衛大將軍)으로 임명되고 평양군공(平陽郡公)에 봉해졌다
征東, 什?羅通掃北, 什?巴駱和, 什?宏碧緣.
상마무양 계견불견 촌부야노 산좌과붕두가방 소담대당유사 심마진양궁 심마봉황산 심마마천령 심마설인귀정동 심마나통소북 심마파락화 심마굉벽연
뽕나무와 삼이 문제가 없고 닭과 개가 놀라지 않고 마을 촌부의 촌스런 노인이 오이 시렁과 콩 선반 옆에 앉아서 대당나라의 일을 담소하니 어떤 진양궁, 어떤 봉황산, 어떤 마천령, 어떤 설인귀가 동쪽을 정벌하며 어떤 나통이 북쪽을 소탕하며 어떤 파락화 어떤 굉벽연이 있었다.
最出奇動人的, 是蓋蘇文興妖作怪, 樊梨花倒海移山, 唐三藏八十一難, 孫悟空七十二變, 說得天花亂墜, 神怪迷離 迷? [m?l?]:1) 흐릿하다 2) 분명하지 않다 3) 흐리멍덩하다

최출기동인적 시개소문흥요작괴 번리화도해이산 당삼장팔십일난 손오공칠십이변 설득천화난추 신괴미리
가장 기이한 사람을 뽑자면 연개소문이 요괴를 만들음과 번리화가 바다를 거꾸로 하며 산을 옮기며 당나라 삼장법사가 81가지 어려움이 있고 손오공의 72가지 변화와 하늘꽃이 어지럽게 떨어지게 하는 신기하고 괴이하여 분명하지 않다.
其實是半眞半假 半?半假 [b?n zh?n b?n ji?]:1) 정말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다 2) 진심이 아니다
, 若有若無。
기실시반진반가 약유약무
실제는 반은 진짜이며 반은 가찌이며 있는 듯 없는듯하다.
咳!我想這班村夫野老, 能識得幾個字?
해 아상저반촌부야로 능식득기개자
아! 내 생각에 이런 무리의 촌의 거친 노인이 몇 글자를 알아보겠는가?
能讀過幾句書?
능독과기구서
몇 구절의 서책을 읽어보았겠는가?
無非藉神社?劇、茶肆 茶肆:다방, 중국에서, 차를 마시거나 점심을 먹을 수 있게 되어 있는 사교장 겸 오락장
盲詞 盲詞:m?n? c? 舊時一種民間的說唱文學。演唱者多盲人,故稱
, 灌輸 灌? [gu?nsh?]:1) 물을 대다 2) 주입하다 3) 심다
了一些見聞, 就借那閑着 ?着 [xi?n//?zhe]:1) 비어 있다 2) 한가하게 있다 3) 빈둥거리고 있다
時候, 說長論短, 談古說今, 自稱爲大唐人, ?述那大唐事, 究竟唐朝有若干 若干 [ru?g?n] :약간. 조금. 소량
皇帝?
무비적신사희극 다사맹사 관수료일사견문 취차나한착시후 설장론단 담고설금 자칭위대당인 희술나대당사 구경당조유약간황제
신사의 희극과 차마시는 다방의 구비문학의 창이며 조그만 견해를 주입하고 한가할때를 빌려 장단점을 논의하며 고대와 지금을 설명하니 자칭 대당사람이라고 하며 대당의 일을 즐겨 서술하니 마침내 당나라 왕조의 조금의 황제가 있음을 알았다.
多少版圖?
다소판도
판도는 얼마인가?
一古腦兒 ?? [n?or]:1) 뇌수 2) 머릿골
莫明其妙。
일고뇌아막명기묘
한 고리타분한 머리로는 그 오묘함을 밝히지 못한다.
甚且把神功妖法、子虛烏 子虛烏有 '자허와 오유'라는 뜻으로, 실제로는 있지 않은 허구의 일이나 사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중국 漢나라 때 司馬相如가 지은 子虛賦에서 유래
有等談, 信爲眞有, 看似與國無害, 與家無損, ?知 ?知 [n?zh?]:1) 뜻밖으로 2) 의외로 3) 생각 밖에
恰有絶大關系。
심차파신공요법 자허오유등담 신위진유 간사여국무해 여가무손 나지흡유절대관계
신기한 공과 요사스런 방법과 자허와 오유의 있지 않는 담론은 진짜 있다고 믿지만 나라에는 해가 없고 집안에 손상이 없는데 뜻밖에 흡사 관계가 있다.
二十年前的義和團、紅燈照북청사변(北淸事變), 단비(團匪)의 난, 권비(拳匪)의 난이라고도 한다. 산둥성[山東省] 부근에는 청나라 중기부터 백련교(白蓮敎)의 한 분파인 의화권(義和拳)이라는 비밀결사가 있어 한국의 태권도와 같은 권술(拳術)을 전수하고, 주문(呪文)을 외면 신통력이 생겨 칼이나 철포에도 상처를 입지 않는다고 믿었다. 1894년의 청일전쟁 후 열강(列强)의 침략은 중국을 분할의 위기에 몰고, 또한 값싼 상품의 유입 등으로 농민의 경제생활은 파괴되었다. 특히 특권을 지닌 그리스도교의 포교는 중국인의 반감을 사 배외적인 기운이 높아갔다. 의화권은 그리스도교회를 불태우고 그 신도들을 살해하는 반(反)그리스도교 운동이 진행되는 가운데 파산한 많은 농민들과 함께 급속하게 발전하였다.

한편 열강의 침략은 지배층 안에도 수구파(守舊派)와 양무파(洋務派)라는 대립집단을 파생하게 하였다. 수구파는 종래의 지배자이던 서태후(西太后) 등의 만주인(滿洲人) 귀족층이 중심이고, 양무파는 열강에 의존해서 새로이 힘을 뻗어온 이홍장(李鴻章) 등 한인(漢人)의 고위 관료가 중심이었다. 수구파는 의화권을 탄압하기 어려운 것을 알고 역(逆)으로 이를 이용해서 열강이나 양무파에 대항하려 하여 의화권을 의화단으로 개칭, 이를 반합법화(半合法化)하였다. 의화권도 '청조(淸朝)를 받들고 외국을 멸망시킨다는 부청멸양(扶淸滅洋)'의 기치를 내걸고 배외(排外)를 주요 투쟁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1899년 말에 양무파의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산둥순무[山東巡務]에 취임하면서 의화단을 탄압하였기 때문에 이들은 허베이성[河北省]에 유입하게 되었고 대운하(大運河)·경한철도(京漢鐵道) 연선(沿線) 일대에 퍼지게 되었다. 이들은 다시 순식간에 화베이[華北]의 모든 성(省), 동북지방·몽골·쓰촨[四川]으로 확산하여 외국인이나 교회를 습격하고 철도·전신을 파괴하고, 석유 램프·성냥 등 외국제품을 불태웠다. 청나라 조정의 태도는 시종 동요하였으나 수구파의 지도 아래 의화단 이용책을 취하여 1900년 6월 열강에 선전을 포고하였다. 베이징[北京]에까지 침입한 의화단은 관군(官軍)과 함께 열강의 공사관을 공격하고 베이징이나 톈진[天津]에서는 의화단원이 거리에 넘쳐 그 세력은 절정에 이르렀다. 근교(近郊)의 농촌에서 베이징에 집결한 의화단원은 10대의 소년이 많았으며 빨강·노란색의 천을 몸에 감고 팔괘(八卦)로 대오(隊伍)를 나누었다. 이들에게는 전체적인 지도자는 없고 동리마다 권단(拳壇)을 설치, 이 단이 의화단의 한 단위였으며, 대사형(大師兄)이라고 불리던 지도자가 단의 책임자였고 10대의 소녀들도 홍등조(紅燈照)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영국·러시아·독일·프랑스·미국·이탈리아·오스트리아·일본 등 8개국은 연합군을 형성하고 대고포대(大沽砲臺)와 톈진에서 관군과 의화단을 격파하였고, 8월에는 베이징에 입성하여 농성 55일에 접어든 여러 나라의 공사관원들을 구출하였다. 서태후와 광서제(光緖帝)는 시안[西安]에 피신하고 실각한 수구파에 대신해서 실권을 쥔 양무파는 연합군에 협력하여 의화단 잔당을 학살하였다. 1901년 베이징의정서[北京議定書:신축조약 辛丑條約]가 성립되자 중국의 식민지화는 한층 깊어지고 이후 중국은 막대한 단비배상금(團匪賠償金)의 지불로 오랫동안 경제적 괴로움을 겪게 되었다.
, 不曾說有齊天大聖附身、黃連聖母下世??
참고문헌
중국역조통속연의 당사통속연의, 중국 채동번 저, 삼진출판사, 1-12페이지
하고 싶은 말
당나라 시대 역사를 채동번이 소설로 번역하여 실제 정사인 역사에 가깝게 풀이해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