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사회] 정조와 규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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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시대사회] 정조와 규장각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정조의 학예사상
◆문체반정(文體反正)
◆규장각이란 무슨 뜻일까?
규장각은 어떻게 설치되었는가?
◆약탈과 밀반출로 점철된 오욕의 역사
◆약탈당한 문화재 반환의 어려움
◆체계적인 조사와 전문기구 설치
◆도서 반환에 관한 운동과 조사
◆도서 반환 협상에 관한 문제점
◆현재의 진행 상황
본문내용
정조의 학예사상

정조는 학문을 생활화한 군주였다. 일상생활에 근거한 실용학문을 제창함과 동시에 스스로 고된 경명행 수(經明行修)의 도(道)를 실천했다. 그의 학문적 기반은 종경(宗經)이었다. 문학의 근본 역시 종경(宗經) 이었다. 문풍은 정치현실의 반영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 문체책은 결국 주자학적 도학자들의 문이재도 론(文以載道論)에 의한 복고책으로서 , 그 회귀점은 우선 국초의 질박(質樸)한 문풍이지만, 종국의 귀착 점은 육경학(六經學)이었으며, 정확=(正學) 경학(經學)=실학(實學)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와 같은 도문일치론(道文一致論)에 의하면, 학문에 기반을 둔 문장을 주장함으로써 양자는 표리의 관 계로 그 한계가 모호해지며, 양자의 뿌리는 하나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것으로, 그것이 이른바 종경인 것이다. 육경이외에는 제자(諸子).사서(史書).팔가문(八家文.)주자(朱子등이 규범으로 제시되고 있다. 또 한 문이재도론에 의해 문장이란 도를 담는 그릇으로 파악되어 성정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인식되며, 문 학은 학문의 부용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문장은 기예로 전락해 버리고 문학의 공용성만이 부각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복고적이며 보수적인 학풍내지 문풍을 주장한 것은 양란(兩亂) 이후 풍미하게 된 명청문책(明淸 文策) , 패관소설류(稗官小設類), 서학 그리고 북학파의 신체문 등이 명분과 기존 질서에 배치되는 요소 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권의 강화라는 지상과제와도 관련해 국초의 문물제도에로 복귀하려는 강한 성향을 보이면서, 좀더 근본적인 구폐책으로서 유학의 본원인 요순삼대의 정신으로 복귀하려는 육경학을 내세우게 된 것 이다.
참고문헌
왕조의 유산 - 외규장각 도서를 찾아서 (이태진 지식산업사)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 (정옥자 효형출판)
한국의 문화유산 (최정호 나남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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