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사상] 김교신에 대해서

 1  [교육사상] 김교신에 대해서-1
 2  [교육사상] 김교신에 대해서-2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교육사상] 김교신에 대해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 생애 및 활동 [1901.4.18 ~ 1945.4.25]

1901년 4월 18일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하였다. 유가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1918년 함흥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다음해 일본으로 건너가 1920년 4월에 어느 청년의 노방전도를 듣고 유교에서 기독교로 입신하여 세례까지 받았지만 그 해 11월에 야라이쪼 교회의 온건한 기요미즈 목사가 반대파의 음모와 술책으로 추출되는 내분에 접하여 깊은 충격을 받고 반년 동안 교회에 가지 않고 고민하다가 당시 무교회주의 기독교의 창시자였던 우치무라간조(內村鑑三)의 문하에 들어가 7년간 성서 강의를 들었고 그는 1927년에 귀국할 때까지 그에게 사숙하였다. 일본에서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였고, 귀국 후 함흥 영생여고보(永生女高普)․양정고보(養正高普)․개성 송도중학․경기중학 등에서 박물학(博物學)을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1927년에 함석헌(咸錫憲)․송두용(宋斗用)․정상훈(鄭相勳)․유석동(柳錫東)․양인성(楊仁性) 등과 함께 《성서조선(聖書朝鮮)》을 창간, 교리전파에 심혈을 기울였고, 양정고보 재직시에는 ꡐ물에 산에ꡑ라는 모임을 만들어 학생들과 서울 근교의 고적과 능묘 ․사찰 등을 답사하면서 민족의식과 역사감각을 고취하여 독립사상과 자립의지를 심어 주었다.

1940년 경기중학으로 전근되었으나 불온교사로 낙인이 찍혀 6개월만에 사임하고, 다음해 송도중학으로 옮겨 민족주의 교육, 국적 있는 역사교육을 통해 민족혼을 안겨 주었다. 1942년 3월 소위 ‘성서조선사건’이 일어나 독립운동의 혐의로 김교신을 비롯한 12명이 일 년간 투옥되었다. 당시 《성서조선》158호(1942년 3월) 권두언 〈조와(弔蛙)〉에 나타난 글의 내용은 극심한 겨울 추위에 다 얼어죽고 용케 살아남은 두 세 마리의 개구리에 대한 단상(斷想)이다. 이 글이 당시 일본경찰의 반감을 불러일으켜, 이로 인해 전국의 독자들도 구속되고 잡지는 모두 압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