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독의 감시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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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독의 감시체제에 대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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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공안국(Ministerium fur Staatssicherheit, MfS) 그리고 비밀경찰(Die Stasi)
동독의 국가공안국(Ministerium fur Staatssicherheit, MfS)은 흔히 비밀경찰인 슈타지(Stasi, 국가안보Staatssicherheit에서 유래)로 알려져 있다. 국가공안국은 1950년 2월 소련의 KGB의 주도하에 창설된 이래 독일통합 직전 1990년까지 동구권에서 가장 강력한 첩보조직으로, 정보요원과 비밀경찰으로 구성되었다. 국가공안국의 본부는 동베를린에 있었으며, 리히텐부르크의 확장 조직 등을 비롯한 여러 개의 소규모 조직들이 도시 전체에 퍼져 있었다. 동독의 국가공안국은 넓은 의미로 세계에서 가장 효과적이었던 첩보기관으로 평가 받고 있다. 국가공안국의 모토는 당의 방패와 검(Schild und Schwert der Partei)이었는데, 이것은 창설 배경에서도 이 기관이 소련의 공산당에 해당하는 동독의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ozialistische Einheitspartei Deutschlands, SED)과 관련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서독인 1만2천명도 동원..전국민 일상 감시 동독 정권이 존재했던 41년 동안 슈타지는 62만 명의 민간인 정보원을 두고 있었으며 이중 1만2천명의 서독인이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튀링엔주 슈타지연구소의 연구 결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1989년 당시 슈타지는 18만9천명의 정보원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이는 지금까지 알려진 숫자보다 1만5천명 이상 많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 연구에 따르면 동독 공산당 당원 20명 중 1명은 정보원이었으며 슈타지는 이들을 통해 공산주의 이념에 일탈하는 주민들의 행동을 통제했다.슈타지 정보원은 25세에서 40세 사이의 남자가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이들은 대부분 정치적 신념에 따라 이웃과 친구를 감시했으며 금전적 보상을 노리거나 강요에 의한 경우는 드문 것으로 나타났다. 슈타지는 정보 수집과 방첩 활동 등 정보기관 고유의 임무를 수행했을 뿐 아니라 방대한 정보원 조직을 통해 1천600만 동독 주민의 일상 생활을 감시했다.슈타지 문서관리청은 빌리 브란트 총리 정부 당시인 60년대 말과 70년대 초반에 518명의 하원의원 중 43명이 슈타지를 위해 활동한 사실이 드러나 있는 문서를 공개한 바 있다.
슈타지는 동독 사회뿐만 아니라 서독의 정계, 경제계, 노조, 학계, 종교계, 학생운동 등 모든 분야에도 침투하였고 한다. 1972년 야당인 기민당(CDU)에서는 사민당(SPD) 출신의 브란트 수상을 물러나게 하기 위해 불신임 투표를 추진하였다. 당시 브란트는 동방정책을 추진하여 동독에 유리한 인물이었기에 슈타지는 기민당 슈타인 의원에게 약 5만 마르크 상당의 금품을 제공하고 브란트를 지지하도록 공작하였고, 그 결과 불신임 투표안은 부결되었다.
▲ 1966년 대연정 수립에 합의한 독일의 빌리 브란트 사민당수(오른쪽)와 키징거 기민당수가 악수하고 있다. 사민당의 정권참여는 슈타지에게 서독의 최고급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브란트는 이후 자신의 보좌관이 동독의 고정간첩이었음이 드러나 총리직을 사임했다.
사민당의 원내총무 빈난트 의원 역시 20년 동안 슈타지의 비공식 정보요원으로 활동하였다. 서독의 각 정당에서 암약했던 비공식 정보요원의 수는 120명이었고, 연방의회 의원만도 8명이나 되었다.
경제계에는 서독의 각종 연구소, 개발 실험실, 기업체들을 대상으로 침투공작을 하였다. 주로 벤츠, 지멘스, 쉐링 등의 대기업과 거대 조선소가 목표 대상이었다.
▶나치 치하에서는 히틀러에게 저항했고, 역대 서독정권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던 그는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유난히 유화적이었다.
“파시즘이 팽배하던 시기에 교회는 침묵함으로써 죄를 지었다. 이제 교회는 신도들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무엇이든 불사해야 할 것이다.”(포스터 내용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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