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순태 인천개항과 중국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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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인천개항과 중국상인
1876년 병자수호조규(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장기간 엄격하게 무역을 제한해 온 조선왕조는 자유로운 국제무역에 문호를 열었다. 1910년 한일합병 때까지 아홉 곳의 개항장이 설치되었는데 인천은 그 중 세 번째로 1883년에 개항되었다.
개항 후 인천에서는 대 일본 무역과 함께 상하이를 비롯, 옌타이, 톈진 등 황해 연안 여러 항구와의 무역이 급속하게 성장했다. 중국이 인천의 무역상대국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청일전쟁 직전 최고조에 달하여, 특히 수입무역에서는 50%를 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인천의 대중국무역을 지탱한 것이 중국상인들이었다. 한국 개항장에 중국인이 건너온 것은 1882년으로, 인천에서도 개항 직후부터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청국영사관 기록에 따르면, 1883년 9월 무렵 인천에 점포를 갖춘 중국인은 두 가구 10여 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해말까지 일곱 가구 60여 명으로 증가하였고, 선원과 일시체류자를 포함하면 그 수십 배의 중국인이 건너왔다고 한다. 또 세관통계에 따르면 인천의 중국인 숫자는 1886년 말의 238명에서 1893년 말에는 678명으로 증가하였다. 같은 시기 일본인은 796명에서 2,504명으로 증가하였다. 수적으로는 열세였던 중국인이 무역액에서는 일본인의 그것을 상회한 것으로 보아, 상업활동이 얼마나 활발했는지를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1880년대부터 1894년 청일전쟁까지 조선에서 청나라의 정치적 영항력은 매우 컸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상인에 대해서는 청나라의 정치적 비호 하의 강압적 상업활동으로 이익을 얻었다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그런 측면이 있었던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당시 중국상인은 한국 뿐 아니라 동아시아·동남아시아 전역에서 급성장하여 아시아 역내 무역의 담당자로 활약하고 있었다. 인천 중국상인의 활동은 그 일단이었고, 인천은 그 중국상인의 활동을 통해 ‘아시아로 열린 창구’가 되었던 것이다. 동순태(同順泰)와 그 경영자였던 탄졔셩(譚傑生)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동순태와 탄졔셩
동순태는 한국의 개항 직후부터 1930년대까지 인천과 서울을 거점으로 활동한 중국상회이다. 경영자인 탄졔셩은 무역업 외에 금융업과 부동산업에도 진출하여 1920년에는 서울에서도 유수의 부호가 되었다.
탄졔셩의 경력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점이 많다. 1970년대 유족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1853년 광동성 꺄오야오현(高要縣)에서 태어났고, 1874년에 조선으로 건너와 1929년 사망하기까지 동순태의 경영자로서, 또 한국 내 중국인사회의 지도자로서 활동했다. 그러나 그가 한국의 개항전인 1874년에 건너왔다는 점은 논란의 대상이다. 1874년 설과 1885년 설이 존재하는 것이다. 러일전쟁 뒤 탄졔셩이 관련된 민사재판 기록에 따르면 그는 1885년에 건너와 거래상이었던 개성상인 손경문의 소개로 서울에도 점포를 열었다고 한다. 그런데 1937년 9월 동순태가 조선에서 출수할 때 자료에 따르면 약 60년 전에 조선에 왔다고 적고 있다. 60년이라는 수치는 1874년에 더 가까운데, 1874년이라는 구체적인 숫자가 제시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1885년이라는 공식적 입장 이외에 가족들 사이에는 1874년이 조선 진출의 해로 구전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한국의 화교라 하면 황해 건너편 산동성에서 왔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1880년대 청국영사의 조사에 따르면 확실히 산동성 출신이 많았지만 중국 남부의 광동성, 중부의 쟝수성(江蘇省), 저쟝성(浙江省)에서 온 사람도 무시할 수 없는 규모에 달했다. 이 여러 성들은 상하이와 홍콩을 중심으로 외국무역과 그에 관계된 산업이 급속하게 발전한 곳이다. 한국의 개항장에도 이들 지역으로부터 최신 상업지식을 가진 중국인이 건너와 새로운 시장의 개척을 시도했던 것이다. 탄졔셩도 그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1884년 인천의 중국 상인 총 235명에서 광동적 상인은 74명으로 산동성의 93명에 1위 자리를 내주기는 했지만,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광동 상인에는 대규모 무역업에 종사하는 대자본이 많아 무역항에 집중해 있었고, 산동계는 광동성 상인이 수입한 상품을 소매하는 소점포 내지 행상인이 많아 최종소비지인 서울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초기에는 인천뿐 아니라 부산, 원산 등 다른 무역항 2곳에서도 광동계가 우세를 보였다. 그러므로 광동방이 수적으로는 산동방보다 못하지만 경제적 영향력은 더욱 컸던 것이다.
한편 동순태에는 정상(政商), 어용상인이라는 이미지가 붙어 있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1890년대 전반에는 청나라 정부의 대리로서 한국정부에 차관을 제공했던 것이 알려져 있다. 실제로 청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조선 내 화교상인의 세력은 크게 신장하여, 1888년에 자본규모에서 일본상인을 압도하게 된다. 청조는 정식 교섭을 통해 중국의 정크선이 인천해관에 세금을 낸 뒤, 마포로 기항할 수 있게 하거나, 인천-용산 간에 기선 항행도 개시하였다. 또 청일전쟁 뒤인 1900년대에는 동순태가 발행한 어음이 서울 시내에 널리 유통되어 일본이 제일은행권과 함께 외국인에 의한 경제침략의 상징으로 비판되었다. 동순태표가 발행 중지된 것에는 국권 침탈적 성격과 이에 대한 애국운동의 결과 못지 않게 위조지폐의 문제가 더 컸다고도 한다. 1904년 8월에 동순태호는 광고를 내 음력 6월 23일부터 1개월 기한으로 전표를 다 회수하려하니 와서 현금으로 태환해 가라고 한다. 그 이유로 ‘본 상점에서 발행한 전표는 수년 동안 여러분의 신용을 입어 감사드리기 이를 바 없다“면서, 최근의 위조 사태로 오용한 분들에게 누가 심하여 유폐를 막기 위해 일괄 회수를 실시한다고 말하였다. 이를 통해 볼 때, 동순태는 오랜 동안 지폐 발행을 통해 안정적인 금융업을 운영해 오다가, 애국주의의 고조와 위조지폐로 인해 중단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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