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형(茶兄) 김현승(金顯承)

 1  다형(茶兄) 김현승(金顯承)-1
 2  다형(茶兄) 김현승(金顯承)-2
 3  다형(茶兄) 김현승(金顯承)-3
 4  다형(茶兄) 김현승(金顯承)-4
 5  다형(茶兄) 김현승(金顯承)-5
 6  다형(茶兄) 김현승(金顯承)-6
 7  다형(茶兄) 김현승(金顯承)-7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다형(茶兄) 김현승(金顯承)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다형(茶兄) 김현승(金顯承)
1. 김현승의 생애
다형(茶兄) 김현승은 커피중독자로 여겨질 만큼 유난히도 커피를 좋아해 호도 ‘다형(茶兄)’이라고 지었을 정도다.
김현승은 1913년 4월 4일 평양의 한 엄격하고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평양신학교를 마치고 제주도 성내교회를 거쳐 광주로 오게 되자 그는 광주 숭일학교 초등과를 졸업하고 평양 숭일중학에 진학하기까지 10년간을 광주에서 살았다. 그가 문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기는 1932년 숭실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하면서부터인데 이 학교에는 양주동과 이효석이 교수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겨울방학이 되어서도 기숙사에 혼자 남아 “북극의 안개 속에서 값싼 커피를 마시고”밤늦도록 시를 쓴다. 그때 쓴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 「어린 새벽은 우리를 찾아온다 합니다」등의 시들을 교지에 발표하는데, 이것이 스승인 양주동의 눈길을 끌었다. 양주동은 이 시들을 1934년 〈동아일보〉문예란에 발표하게 함으로써 김현승은 문단 등단의 관행인 신춘문예나 잡지추천 제도와 상관없이 문단에 나오게 된다.
1935년 《조선시단》과 〈동아일보〉 그리고 교지 《숭전》등에 「묵상수제」, 「유리창」, 「철교」, 「이별의 시」등을 발표한다. 그의 시어들은 깨끗하고 투명하며, 때로는 지나치게 세련되고 지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모더니스트의 성향을 보인다. 비평가 홍효민이 김현승을 ‘혜성처럼 나타난 시인’이라고 극찬을 하고, 정지용, 김기림, 이태준 등도 그에게 격려와 찬사를 보냄으로써 그의 이름은 일찍부터 시단에 알려졌다.
광복과 더불어 광주 〈호남신문〉에 잠시 적을 두었다가 모교인 숭일학교로 자리를 옮겨 교감으로 취임한다. 그는 교육자로서의 직책에도 충실하지만 시작도 게을리 하지 않아 이 무렵 「내일」, 「민성民聲」, 「창」,「조국」,「자화상」등의 시를 발표한다. 1948년 무렵에는 서정주, 김동리, 조연현 등과도 교류하면서 문단활동의 폭도 넓어진다. 1950년에 「생명의 날」, 「가을 시첩」등을 발표한다. 이때부터 그는 인간의 고독이나 허무 같은 삶의 근원적 문제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가 나고 자라면서 줄곧 그의 정신형성에 영향을 미쳐온 것 중의 하나가 기독교다. 그의 시 속에 절대적 타자인 신을 확인하고 그에게 더 가까이 가려는 의지가 엿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에 광주에서 박흡, 장용건, 손철, 이동주 등과 더불어 계간지 《신문학》을 창간하기도 하고, 이듬해 4월 조선대학교 교수로 임명된다. 당시 전쟁의 충격으로 피해망상증과 정신분열 등에 시달려 광주로 내려온 서정주에게 자신의 학동집 바깥채에 거처를 마련해주고 그를 조선대학교 부교수 자리에 앉도록 알선해주는 등 온정을 베푼다. 그러나 그 자신은 네 살 난 아들이 병을 얻지만 전쟁으로 인한 물자 빈곤과 가난 때문에 약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잃게 되는 비극을 겪고, 그의 시 「눈물」은 이때의 애통함을 빚어서 완성한 시다.
1957년에는 그동안의 시들을 모아 첫 시집 『김현승시초金顯承詩抄』를, 1963년에는 두 번째 시집 『옹호자의 노래』를 간행한다. 그는 여전히 주변과 사물을 투명하게 응시하는 시적 자세를 보이지만, 나날이 혼탁해가는 정치현실에 대해서도 서서히 관심을 드러낸다. 1964년 숭실대학교 교수로 자리를 옮기고, 1965년에는 ‘한국문인협회’ 시 분과위원장으로 피선된다.
1968년 세 번째 시집 『견고한 고독』을 내놓는다. 이 시집은 신의 무한성 영원성에 대비되는 인간의 근원적 허무의 자각에서 비롯된 고독의 발견을 노래한다. 1970년 네 번째 시집 『절대고독』에서도 이 고독의 탐구는 계속된다. 1970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에 3선 되고, 숭전대학교 문리대 학장을 역임한다.
1973년 『김현승 시전집』을 출간하고, ‘서울시문화상’ 예술부문을 수상한다. 이해 3월 하순, 차남의 결혼식을 치르고 나오다가 고혈압으로 쓰러져 사경을 헤매다가 한 달 만에 겨우 회복한다. 이 뒤로는 거의 시작을 하지 못하고 오로지 신앙에 전념해 병원과 교회를 오가는 생활을 한다. 평생 가난과 벗하며 시인과 교육자의 길을 걸어왔던 김현승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다시 숭전대학교에 강의를 나갔다가 1975년 4월, 채플시간에 쓰러지며 63년의 생을 마감한다. 『나는 문학이다』, 장석주, 나무이야기, 2009, p.280~284
2. 시기별 작품경향 『김현승 시정신 연구』, 조태일, 태학사, 1998, p.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