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한부

 1  인문과학 한부-1
 2  인문과학 한부-2
 3  인문과학 한부-3
 4  인문과학 한부-4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인문과학 한부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한부(漢賦)
1. 漢賦의 기원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과 그의 중요 신하 대부분과 그와 싸운 항우(項羽) 가 모두 초나라 사람들이라 한 초기에는 초조(楚調)의 시가가 유행하였다. 고조의 「대풍가(大風歌)」「홍곡가(鴻鵠歌)」와 항우의 「해하가(垓下歌)」, 당산부인(唐山夫人)의 「안세방중가(安世房中歌)」등이 한초에 나온 「초가(楚歌)」라 불리는 초조의 시가인데, 이 는 에 비하여 길이는 짧지만 구법은 서로 같다.
한실의 왕족들인 오왕(吳王) 유비(劉) 양효왕(梁孝王) 유무(劉武) 등도 모두 를 좋아하여, 그들 문하에 추양(鄒暘) 엄기(嚴忌) 매승(枚乘) 사마상여(司馬相如) 등 많은 문인들을 길렀다. 이러한 왕실의 초사애호로 말미암아 무제 시대에 새로운 부(賦)라는 문학형식이 완성된 것이다. 문제(文帝) 때 가의(賈誼)의 「조굴원부(弔屈原賻)」 「복조부(服鳥賦)」등은 의 유형을 지니고 있지만 무제 때 사마상여의 「자허부(子虛賦)」 「상림부(上f林賦)」 등에 이르러는 그 내용과 형식이 에서 좀더 발달한 라는 새로운 문체를 이루게 된다. 시라기보다는 산문적 성분이 늘어났고 대화형식을 많이 빌려 쓰고 있으며, 내용에 있어서는 개성이나 개인의 감정보다도 일정한 일이나 물건을 거창하고 아름답게 서술 묘사하는 것으로 변하고 있다.
한부는 황실과 귀족들의 애호를 바탕으로 삼고 있으므로 부는 처음부터 귀족들의 전유물인 듯한 성격을 띠었다. 한부의 대표적인 작가인 사마상여의 경우, 그의 작품인 「자허부」는 양효왕 밑에 놀면서 왕실 생활을 찬미하기 위해 지은 것이고, 「상림부」는 다시 황제의 유렵(遊獵)의 장관을 노래함으로써 무제에게 아부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부의 작가들은 자기의 문재(文才)를 총동원하여 미사여구(美辭麗句)로 아름답고 멋진 문장을 엮어 놓음으로써 듣는 이의 귀를 즐겁게 하고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하려는 것이다. 황제들은 이들을 광대처럼 궁정에 길러 두며 그들의 글재주를 필요에 따라 이용하며 즐겼던 것 같다.
무제시대(B.C. 140~B.C. 87)는 부의 전성기로서, 양웅(揚雄) 반고(班固) 장형(張衡) 같은 부의 대가들이 나왔다. 그러나 부는 형식주의적인 경향 때문에 모의(模擬)의 수법이 더해만 갔다. 양웅의 「감천부(甘泉賦)」 「우렵부(羽獵賦)」 「장양부(長楊賦)」「하동부(河東賦)」는 사마상여의 「자허부」와 「상림부」의 모작이며 반고의 작품 중 잘 알려진 「양도부(兩都賦)」도 사마상여의 모작이다. 장형의 대표작인 「이경부(二京賦)」라 불리는 「서경부(西京賦)」와 「동경부(東京賦)」가 반고의 「양도부」의 재모작이라는 것 또한 잘 알려진 사실이다.
2. 漢賦의 특징
(1) 한부는 개성이나 개인의 감정을 부정하고 객관적인 사물을 미사여구를 늘어 놓으면서 아름답게 표현하는 데 힘쓴다. 한자가 지니는 문자의 특성과 회화적인 형체상의 특성 및 음악적인 성운(聲韻)상의 특성을 다 살려 어떤 사물을 포장서술(鋪張舒述)하는데 그칠 뿐이지만, 이러한 부의 형식주의적인 노력이 중국문학의 수사(修辭) 발전에 있어 큰 공헌을 한 것은 중요한 가치이다.
(2) 부는 황제와 귀족들 아래 지배계급을 위해 봉사하던 문학이다. 한부의 기원에서 살펴봤듯 사마상여의 「자허부」와 매승의 「칠발」은 양효왕을 위해 지어진 것이고 사마상여의 「상림부」「대인부(大人賦)」는 무제에게 바치기 위해, 양웅의 「감천부」「하동부」등은 성제(成帝)에게 바치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그들은 황제 바로 아래 부속된 상류 사족으로서의 자아만을 알고 있었고, 독자로서는 언제나 황제 귀족 등의 지배층만을 의식하고 있었다.
(3) 부의 작가들은 사물을 진지하게 관찰하고 생각한 것을 노래하지 않고 자기의 문제(文才)를 유희적으로 발휘하는 데 힘썼다. 부의 작가들은 스스로 황제 밑에서 창우(倡優)나 같은 정도로 황제에게 아부하는 부를 지었고, 황제는 또 창우들의 우스갯짓을 구경하는 태도로써 그들의 부(賦)를 대하였던 것이다.
(4) 부의 불성실한 창작태도는 결과적으로 이전 작품의 모방이라는 폐해를 가져왔다. 양웅과 반고가 모작한 사마상여의 작품인「자허부」와 「상림부」도 송옥(宋玉)의 「고당부(高唐賦)」「신녀부(神女賦)」를 모방한 것으로, 후에 양웅과 반고가 그들을 다시 모방하였다.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