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득- 시는 얼마나 새로울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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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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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시는 얼마나 새로울 수 있는가?
-자득-
1. 들어가는 말-‘자득’의 범주
自得은 創新을 뜻한다. 기존의 것을 본뜨지 않은 斬新한 獨創, 創意, 創造 등이 自得의 意味 範疇와 넘나들거나 겹친다. 따라서 이전에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 내는 自得은 ‘따라하기’, 즉 模倣을 嫌惡한다. 주지하다시피 獨創, 創意, 創造 등은 단어 자체가 이미 ‘새로움’을 기본 가치로 內藏한 용어들이다. 즉, 뭇 獨創/創意/創造는 새로워야 獨創/創意/創造의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참다운 의미에서의 ‘새로움’에 대해 懷疑하는 의견도 있다. 이들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는, 전혀 새로울 게 없는 명제를 들먹인다. 이 눈으로 보자면, 우리가 ‘새롭다’고 讚嘆하는 거의 모든 것들이 사실은 ‘無’에서 ‘有’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그것은 다만 旣存의 ‘有’를 變形하거나 觀點을 달리하여 再解釋한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면, 그 자체로 독립적인 절대적 새로움이란 없다. 만약 그러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새로움’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 그러면서 참신한 獨創, 創意, 創造를 요구한다. 矛盾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그렇지 않다. 다음을 보자.
갓난아이가 아주 흔한 인간의 한 예에 지나지 않고, 오래 전에 존재했던 선조로부터 계통을 이어받았지만, 전혀 새로운 개인인 것과 마찬가지로, 문학에 있어서 새롭다는 모든 것은 분명히 옛 것과 똑같은 종류의 것이라는 것이다. (…) 독창적인 작가는 관습적인 작가와 반대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잘못이다. 모든 작가는 관습적인데, 그 까닭은 직접 할 말을 상상의 언어로 바꾸어야 하는 동일한 문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N. 프라이, 이상우 옮김, 《문학의 구조와 상상력》, 집문당, 1992, p.38.
아이 하나가 태어났다. 이 아이는 이전에는 없었던 ‘전혀 새로운 개인’이다. 여기까지에는 異見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새 생명의 탄생에 부모들은 흥분하고, 그에 걸맞은 새 이름을 붙여준다. 그러나 그 아이는 전혀 새롭지 않다(그 아이가 ‘전혀 새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면, 아마 부모들은 기겁을 할 것이다). 그 아이는 아주 오래전부터 ‘관습적’으로 ‘사람/인간’이라 여겨지는 내부 요소와 외형을 갖춘, ‘옛 것과 똑같은 종류’의 사람/인간이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하지만) 그 아이가 사람/인간의 모습과 거리가 먼 어떤 모습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보고 새롭다거나 독창이라거나 창조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새로움은 전혀 새롭지 않은 것을 前提한 상태에서 그 둘의 差異나 變化를 살펴보는 相對的 槪念일 때 意味가 있는 것이지 근본부터 異質的인 경우에는 이 용어 자체가 無意味하다는 것이다.
自得―스스로 터득할 것―은 東洋的 삶에 두루, 특히 敎育·修養·學問 등에서 대단히 우호적으로 요구되는 德目이기도 했다.
맹자가 말하였다. “군자가 바른 도리로써 깊이 탐구하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터득하고자 함이다. 스스로 터득하게 되면, 그것을 대처함에 안정되어진다. 그 일에 대처함이 안정되어지면 그 일에서 얻어내는 것이 깊이가 있게 된다. 그 일에서 얻어내는 것이 깊이가 있게 되면, 자기 가까운 곳에서 취할 수 있게 되며 그 근원을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군자는 자신이 스스로 터득하고자 하는 것이다.” 《孟子》, 卷八, ; 孟子曰: 君子深造之以道, 欲其自得之也. 自得之, 則居之安; 居之安, 則資之深; 資之深, 則取之左右逢其原, 故君子欲其自得之也.
진리의 ‘근원을 만나’려면 ‘스스로 터득[自得]’해야 한다. 수동적인 주입식·암기식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옛 작품을 모방[規摹舊作]’하거나 ‘전인을 답습[蹈襲前人]’ 이병한 편저, 《중국 고전 시학의 이해》, 문학과지성사, 1992, p.161.
하는 것은 적극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자득이 혐오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남이 말하지 않은 것을 말하고 남과 다른 독창적인 意境을 드러내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勤謹[부지런하고 삼감]해야 한다. 근근을 통해 성취한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독보적 경지가 자득 이채경, 《私淑齋 姜希孟의 에 대한 고찰》,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p.86.
이기 때문이다. 고인의 일을 부지런히 배우되 모방은 삼가야 한다. 자신의 목소리를 갈고 닦음에 부지런하되 남의 말을 되풀이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으므로 자득을 위해서는 古人의 일을 배우는데 부지런해야 한다. 옛 사람의 일을 학습하되 潛心窮究할 것은 그들의 精神과 作法이지 字句의 짜깁기나 베끼기가 아니다. 點鐵成金이니 奪胎換骨니 點化니 用事니 말은 많지만 그것이 끝내 字句나 주무르는 데 그친다면 그것은 模倣이요, 蹈襲이요, 剽竊에 불과할 뿐이다.
또, 시에는 ‘내가 있어야[有我]’ 한다. 자기로부터 創發해야 우뚝 설 수 있다. ‘하늘을 이고 땅 위에 우뚝 선[頂天立地]’ 예술가가 되느냐 ‘집 아래 집을 짓는[屋下架屋]’ 부화뇌동의 별 볼일 없는 시인이 되느냐는 자득의 성취 여부로 결판난다. 사람마다 각자의 성정이 있으니 또한 사람마다 각자의 시가 있게 된다. 吳雷發, 《說詩菅》, 이병한, 위의 책, p.173. 人各有性情, 則亦人各有詩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