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코 사망이후 스페인의 문화적 패러다임의 변화와 그 양상 13송이장미들 나비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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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프랑코 사망이후 스페인의 문화적 패러다임의 변화와 그 양상
1. 영화와 문화
2만여 년 전 구석기 시대에 동물의 움직임을 알타미라(Altamira)동굴 벽에 생생하게 표현하고자 했던 원시인들의 의지와 욕구가 근원적인 뿌리가 되어 영화가 탄생한지 100년을 넘어섰다. 하나의 독자적인 매체로 성장하기까지 고난도 많았지만 영화는 꾸준히 발전하여 오늘날에는 활자매체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특히 멀티미디어 기기의 발달에 힘입어 영상매체는 단순한 즐김의 차원을 넘어 사물인식과 사고방식의 매개체이자 인간과 관련된 모든 사안을 다루고 인간 상호간의 교감을 위한 텍스트가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어 비달(Gore Vidal)이라는 문화비평가는 기존의 교육방식을 폐기하고 젊은이들에게 필름을 통해 과거를 알려주자고 제안하기까지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영상세대라 불리는 학생들에게 그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학습적 동기를 유발하는 교육을 위해 영상매체를 사용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영상자료를 통한 문화교육은 문자텍스트로는 불가능한 입체적이고 다층적인 접근을 가능케 하는 도구가 된 것이다. 특히 한편의 영화에는 그 나라의 문화나 사회 그리고 역사나 정치적 측면들이 면면히 반영되어있으며 스페인어권 영화에는 이런 성격이 더욱더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2. 역사와 문화
스페인 현대사의 중요한 분기점은 비극적이고 고통스런 역사적 사건인 스페인 내전(1936-1939)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이 내전의 끝에서 권력을 잡은 사람은 프랑코였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한 후 “가톨릭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스페인”이라는 모토를 내걸고 이질감 투성이의 스페인의 전 지역을 하나로 만들어 효과적인 권력유지를 위해 당시 사회에서 생산되던 모든 문화적 산품들에 대한 검열을 실시하였다. 내전 당시(1938)년의 기준으로 선정된 검열은 30년 가까운 평화기간에도 계속 기능을 발휘했다. 모든 작가들과 예술가들은 공개적인 정치적 비평이나 문화적 표현들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교회의 영향력은 가톨릭 도덕관에 대한 공격과, 조금이라도 호색적인 색체가 있는 모든 문화예술품들은 상연이나 판매가 금지되었다. “교회의 검열은 육체에 대한 청교도적 증오로 부적절하고 조잡스러운 수준에 이르렀다. 권투 선수는 상체를 유색 러닝으로 감싸야했고, 영화배우들은 가슴을 작게 보이도록 쭈그러트려야 했다. 예를 들어 페만이라는 작가는 ”사타구니“라는 말이 그의 소설에서 삭제되어야 출판을 허락하겠다고 나설 정도였다. 당시의 영화에 대한 검열은 주로 정치적 성격을 띤 작품들과 가톨릭 도덕관에 어긋나는 장면과 테마, 즉 간음, 자살, 색정적인 것 등이었다. 이러한 검열은 1950년대 후반까지 계속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검열은 스페인 대중을 1950년대의 헐리우드 영화와 이탈리아의 폭발적인 미인 영화로부터 격리시킬 수 없었다. 이러한 영화들은 스페인의 물질적 빈곤을 뚜렷하게 부각시켜주면서 대중들의 의식에 심각한 변화들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프란시스코 움브랄이라는 문화비평가는 “영화가 우리에게 빈곤의 척도를 알려주었다(F. Umbral, Memorias de un nino...63.)
1962년 국민운동당파 출신의 마누엘 프라가 이리바르네가 당시 문화부 장관 시절 영화 스크린에 비키니차림의 여자가 처음으로 출현했을 프랑코와 그의 추종자이며 오랜 친구(프랑코는 계승주의 정책에 따라 그를 후계자로 삼을 계획을 갖고 있었음)였던 카레로 불랑코는 경악했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언론은 상업적 도구로 외설을 이용하고, 영화는 음란 장면으로 채워져 가고 있었다. 이에 외설의 허용과 자유주의 사상의 용인자로 낙인찍힌 카레로 블랑코는 강압적으로 사임 당한다. 그러나 변화되는 대중의 의식과 자유에 대한 욕구를 억압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1960년대, 특히 서방세계의 자유주의 물결은 70년대 프랑코가 사망할 때 까지 지속된다.
이미 오래 전부터 병상에 누워있던 프랑코가 결국 75년 11월 죽자 스페인 대중들은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상이한 반응을 보여 주었다. 프랑코 체제에 비판적이었던 좌파 성향의 대중들은 억압의 종말과 자유의 도래에 환호를 보냈지만 보수적 성향의 대중들은 보다 복잡한 심리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프랑코를 심정적으로 지지해 왔던 사람들은 영도자의 죽음을 슬퍼했지만 이들도 이미, 60년대 말 이후로 밀어닥친 범세계적인 자유주의 물결과 스페인 사회의 급속한 자본주의화와 함께 프랑코이즘의 시효가 다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프랑코의 퇴장이 가져 올 스페인 사회의 본격적인 유럽화에 대해 내심 기대감도 갖고 있었다고 보이는데 결국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거의 모든 스페인인들이 기대 속에 프랑코의 죽음을 맞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대감은 당장 자유의 향유로 이어졌다. 물리적인 제재가 없어지자 스페인 대중들은 우선 일차적으로 그 동안 금지되었던 자유를 누리려 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프랑코 사망 후 첫 시기는 술, 마약, 섹스가 일상사를 지배한 무절제와 방종의 시기가 되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환멸’에 대한 젊은 층의 대답의 형태로 출현한 것이 모비다(La movida) 문화였다.
3. 프랑코시대의 문화와 스페인 지식인들의 핵심적 동향
당시의 유럽 지식인들의 대부분은 내란의 주역이었던 프랑코의 파시스트적 이데올로기와 대치되는 공화정을 지지하였으며, 스페인내의 지식인들도 대부분이 공화정에 동조하였다. 당시 스페인의 지성계, 특히 시단의 새로운 황금기를 구축했던 여러 시인들과 예술가들은 스페인을 떠나 망명길에 오른다. 전쟁이 끝난 후 “스페인은 국제 사회로부터 고립되어갔으며 문학이라고는 없었다. 죽음의 홍수에 희생되지 않은 자들은 국외로 망명했다. 유럽 최고의 위대한 감성시인이며 상징주의자로 추앙 받았던 후안 라몬 히메네스(Juan Ramon Jimenez)는 1958년 조국이 아닌 푸에르토리코에서 사망하였으며, 20세기 초중반 시문학을 선도하였던 27세대의 스페인의 대표적 시인들인 라파엘 알베르티(Rafael Alberti)와 루이스 세르누다(Luis Cernuda)는 국외를 떠돌았고, 페데리꼬 가르시아 로르까(Federico Garcia Lorca)는 내전의 직접적인 희생자로 살해되었고, 20세기 스페인의 대표적 지성으로 평가받았던 미겔 데 우나무노(Miguel de Unamuno)는 프랑코의 정치적 탄압으로 가택연금 상태에서 세상을 등진다. 결국 내란을 전후하여 활동하였던 스페인 문인들은 이념적 갈등과 내란의 후유증으로 작품활동을 제한 당하거나, 작가들 스스로 제한했으며 일부는 망명길에 오름으로써, 스페인 문단은 “침묵과 공허가 활발한 문학활동을 대신하고 서점들은 3류 번역소설작품들”로 채워진다.
그의 체제 하의 문화정책의 기본 틀은 “고유하고 독특한 문화를 창조하려는 긍정적인 정책보다는 검열을 통하여 통제하려는 제한적 정책”이었다. 특히 교회는 국가로부터 독립된 신문, 라디오 방송 및 정부의 간행물들은 전국 “신문 및 광고위원회”와 관련을 맺고 모든 문화기구를 관리하였다. 가톨릭의 지지는 체제를 합법화시켜주고 프랑코가 필요로 하던 문화적 통합을 가능케 해주었다. 따라서 프랑코체제의 수호론자들에 의한 문화적 생산품들에 대한 통제는 프랑코주의 문화의 시대착오적이고 진부한 것들이 노출되는 것을 1950년대 초까지 지연시키는데 주력한 것이었다. 프랑코체제의 수호론자들이 갖고 있었던 특징은, "민족주의적 열광, 정신적 영광, 군사적 덕행, 가톨릭의 찬미,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예술 형태와 양식에 대한 선호 등 공통된 문화적 요소를 공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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