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어학 최승희에 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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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문어학 최승희에 대한 연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최승희에 대한 연구
1. 머리말
2. 최승희의 생애
3. 최승희의 예술세계
1)이시이바꾸(石井漠)
2)한성준(韓成俊)
3)매란방(梅蘭芳)
4)최승희의 예술작품
4. 최승희에 대한 평가
1) 긍정적 평가
2) 일본 문학 속의 최승희에 대한 평가
① 소설속 주인공으로의 최승희
② 일본문화의 뿌리로 무한한 가능성을 내재한 예술
3) 부정적 평가
5. 맺음말
1. 머리말
우리는 과거 최승희라고 말하지 못하고 글을 쓸 때 최모라고 하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북한에 대한 자료가 일반인에게 공개 되면서 문학, 음악, 연극 등 여러 예술계에서는 월북예술가에 대한 연구도 많이 진전되고 있다. 그러나 무용의 경우 신무용의 대모라 할 수 있는 최승희의 역사가 바로 잡히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승희는 과거에 세계를 누비고 다니던 세계적 무용가이지만 불행히도 일본과 북한이라는 이질적 국가체제에서 무용을 하였기 때문에, 그녀가 친일적 행위나 용공적 행위를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최승희의 역사에서 이를 은폐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떳떳하게 밝히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러한 최승희의 역사를 단순히 미움으로만 보는 것은 이제는 극복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최승희의 공적이 크다 하여 무조건 영웅시하는 것도 옳지 않다. 따라서 최승희 연구나 재평가는 그녀 개인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서나, 그녀 개인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다. 최승희의 생활과 무용을 민족사적인 면에서 재조명해 보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최승희가 일제시대 친일행위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근원적으로 보면 우리 민족이 나라를 잃고 일제시대 식민지하에서 살았기 때문이고, 최승희가 용공행위를 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의 민족적 비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때, 그녀를 민족 수난사적인 입장에서 조명해 본다면 최승희는 희생자라 할 수 있고, 민족 개화사적 입장에서 보면 문화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최승희의 연구나 재평가는 과거사적인 것에만 머물지 말고 2000년대의 통일을 위한 의미가 담겨 있어야 하고, 나아가서는 미래에 살아갈 우리의 후손들에게 우리 민족 춤의 맥락을 세워주기 위해 미래 지향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2. 최승희의 생애
최승희는 1911년 부유한 양반계급의 4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개화된 집안이었기에 남들보다 먼저 소학교에 들어갔으며, 소학교를 마치고 이내 숙명여학교에서 진학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자들이 획책한 조선반도의 식민지화 정책인 토지조사 사업에 의거, 재산을 노리던 모리배들에게 재산의 대부분을 몰수당하여 그들 여섯 식구는 하루아침에 어려운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집안 형편에서 최승희가 학업을 계속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학교 측의 배려로 동급생들보다 2년이나 앞서 월반까지 하면서 여학교를 졸업(1925)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뛰어난 재능과 우수한 성적을 아끼는 학교 측의 주선으로 도쿄에 있는 음악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으나, 전문 과정에는 16세가 되어야 입학할 수 있었기에 연령미달로 포기해야 했다. 또한 사범학교의 입학시험에 응시, 합격되었으나 연령문제로 입학을 유보 한다는 통지를 받았던 것이다.
1926년 3월 이시이 바쿠(石井漠) 石井漠(1886-1962): 다이쇼(大正)와 쇼와 시대의 무용가. 성기숙.「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이시이바꾸(石井漠). 댄스포럼 7월호 참고.
의 경성 공연 때 오빠 최승일 최승일: 당시 경성방송국에서 연예분야 담당자로 연출과 아나운서 역할까지 맡고 있었다.
이 동생에게 그 공연을 보고 이시이를 만나 볼 것을 권유 하였다. 이 공연에서 최승희는 이시이 바쿠의 「수인」 은 “자유의 빼앗김에 대한 분노와 번민을 극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유럽 공연에서 등(背)으로 추는 ‘전위적 무용‘이라고 절찬을 받았다.
에서 충격을 받고 춤에 입문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시이 바쿠를 직접 면담하고 3년 동안 춤 수련을 쌓을 것을 승낙 받은 직후 최승희는 이시이 무용단과 함께 동경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