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명학의 성격과 영향 양명학 배경 양명학 성격 주자학과 양명학 조선의 양명학

 1  양명학의 성격과 영향 양명학 배경 양명학 성격 주자학과 양명학 조선의 양명학-1
 2  양명학의 성격과 영향 양명학 배경 양명학 성격 주자학과 양명학 조선의 양명학-2
 3  양명학의 성격과 영향 양명학 배경 양명학 성격 주자학과 양명학 조선의 양명학-3
 4  양명학의 성격과 영향 양명학 배경 양명학 성격 주자학과 양명학 조선의 양명학-4
 5  양명학의 성격과 영향 양명학 배경 양명학 성격 주자학과 양명학 조선의 양명학-5
 6  양명학의 성격과 영향 양명학 배경 양명학 성격 주자학과 양명학 조선의 양명학-6
 7  양명학의 성격과 영향 양명학 배경 양명학 성격 주자학과 양명학 조선의 양명학-7
 8  양명학의 성격과 영향 양명학 배경 양명학 성격 주자학과 양명학 조선의 양명학-8
 9  양명학의 성격과 영향 양명학 배경 양명학 성격 주자학과 양명학 조선의 양명학-9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양명학의 성격과 영향 양명학 배경 양명학 성격 주자학과 양명학 조선의 양명학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 양명학의 배경
14세기 몽고(元) 통치의 점차적인 쇠퇴는 황족 내의 분열에 의해 촉진되었으며, 1340년대의 반란과 1351년에서부터 1353년에 이르는 여러 중요한 반란 등은 원元의 패망을 재촉하였다. 한편 1333년이래 15년간 빈번히 일어난 기근은 황하의 범람에 의해 절정에 이르렀다. 홍수와 기근은 곡창을 고갈시켰으며 원元의 정치 토대를 위태롭게 하였다. 원말의 주원장(朱元璋1328~1898)은 양자강 하류의 곡창지대를 손에 넣고 1368년 금릉金陵(南京)에서 명나라(1368~1644)를 건설하였으며, 1382년 중국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밖으로는 북방의 몽고족과 여진족, 남방의 이민족의 위협이 여전히 상존하였다. 명조는 중화주의에 따라 주변국들에 대해 속국의 보호자로서 위협과 회유의 양면정책을 썼다. 그러나 몽고족의 약탈행위와 이민족의 침략으로 중국의 변방은 계속 시끄러웠다. 한편 안으로는 절대적인 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중앙집권적 정치, 군사 제도를 확립하였다. 명 왕조의 영속화를 기도한 태조는 군주권력의 절대성을 조금이라도 해칠 위험이 있는 사상을 두려워했기에 군주를 절대시하는 송학宋學, 주자학을 관학으로 삼아 사상적 통일을 꾀하고 사서오경을 내용으로 한 엄격히 규정된 형식의 과거시험을 통해 관리를 등용하였다. 과거의 답안의 내용이 규제됨과 더불어 답안의 문장 형식, 서술의 순서까지도 세부적으로 규정되었다.
[명사明史] [유림전儒林傳 .서序]에서는 당시 학술계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대저 명대 초기의 여러 유학자를 살펴본다면 모두 주자 문인에게서 파생 되어 나온 사람들로서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이어받아 연유하는 곳이 있으며 법도가 잘 지켜지고 있었다. 실천을 독실하게 하고 법도를 신중하게 여기며 앞선 유학자들의 올바른 도의 전함을 지키고 감히 고치려 함이 없었다.
이 결과 명대의 학풍은 사상가들의 자율적이고 지적인 탐구보다는 단순히 理의 실천만을 강조하는 경직된 분위기로 나타났다. 학문을 권세와 이욕利浴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삼았으며 진지한 학문적 탐구심을 결여하고 단지 형식적 이理에 대한 박학광구博學廣求나 맹목적 실천주의로 흐르는 경향을 초래하였다. 게다가 포악하고 어리석은 군주들의 잇달은 실정, 당쟁과 관료의 부패, 환관의 전횡 그리고 재해의 빈발 등으로 국가 기강은 파괴되고, 여러 차례의 내란과 도적들의 빈발로 백성들은 질고에 허덕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명대 중기의 학자로서, 정치관료로서 또한 군사 지휘자로서 활약하였던 왕양명王陽明(1472~1528)은 학문이란 과거 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인 됨을 위한 것이라 보면서 공자와 맹자가 추구하였던 유학의 목적과 그 방법을 다시 정립하고자 하였다.
◎ 양명학의 성격
명나라 초기 진헌장(陳獻章)은 독서에 의한 자기 수련법에 대하여 의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독서를 버리고 정좌(靜坐)를 통하여 사색한 끝에 천리(天理)를 체인(體認)할 것을 주장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이 학문하는 까닭은 도리를 듣고자 하는 것이다. 도(道)를 서적에서 찾으나 얻지 못하니 도리를 내 마음에서 찾는 것이 옭겠다라고 했다. 이로써 진헌장의 심학(心學)은 양명학의 선구가 되었다. 이어 왕수인에게서 심학이 체계화되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그는 초기에 이학(理學)을 공부하다가 주자(朱子)의 성즉리(性卽理)와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에 회의를 느꼈다. 즉 원리와 원리 실현의 소재[氣]를 엄격히 구별하여, 마음은 기이고 마음이 갖춘 도덕성 등의 이치는 이(理)라고 한 주자의 견해에 대하여, 만물일체와 이렇게 불교에서 받은 영향이 있는 반면, 양명에도 송 대부터 본격화된 불교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첫째 선불교의 神會(670~762)는 차별적 사물들의 특성에 대한 분별,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도록 무념 무상의 교리를 가르쳤으나 양명에 의하면 우리가 깨어있는 한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둘째 神家들은 현상의 사물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주장하면서 오히려 그러한 현상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 불교는 無로부터의 頓悟를 주장하지만 양명은 일상의 인간사에서 마음을 닦기를 주장한다. 넷째 불교의 마음 수양의 방법은 세상을 다스리는 일에 아무런 도움이 못 된다고 하는 것이다.
불교의 삼계(三界)는 현재과거미래의 세 가지 세계를 말한다. 또는 사물의 발생 근원인 무의식의 세계, 현실적으로 사물이 존재하는 이 세계, 그리고 이상적인 세계의 셋으로 나누는 방법도 가능하다. 이러한 세 가지 세계는 모두 마음에 따라 이루어 졌다고 화엄에서 주장한다.
삼계유심(三界唯心)의 입장에서 마음이 곧 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의 사상적 교설은 대체로 심즉리, 지행합일, 치양지의 순서를 밟고 있다. 물론 그것이 내용적인 단절이 아니고 표면적인 변천이긴 하지만 가르침이 세 번 변한다는 과정적, 형식적인 점에 착안하여 이것을 보통 교敎의 삼변三變이라고 한다.
심즉리 중국 사서(四書)의 하나인 《대학(大學)》에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8조목으로 된 내용 중, 처음 두 조목인 격물, 치지가 본래의 뜻이 밝혀지지 않아 후세에 그 해석을 놓고 여러 학파(學派)가 생겨났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주자학파와 양명학파이다. 주자는 격(格)을 이른다[至]는 뜻으로 해석한데 반면 왕양명은 격을 물리친다는 뜻으로 풀이하여 심즉리설을 확립하고 사람의 참다운 양지(良知)를 얻기 위해서는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물욕(物欲)을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은 곧 이이다. 천하에 심외(心外)의 일이 있고, 심외의 이가 있겠는가 라는 주체적인 자각에서 심즉리가 정립되었다고 했다. 심외에 사물이 없고, 심외에 일이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객관적인 외계(外界)의 사물은 마음을 떠나면 소멸해 버린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가 남진(南鎭) 땅에서 바위 위에 핀 꽃을 보고, "저 꽃은 스스로 피고 스스로 떨어지니 우리 마음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가" 하고 질문했을 때, 왕양명은 "당신이 이 꽃을 보지 못했을 때는 이 꽃은 당신의 마음과 함께 고요했다. 그러나 당신이 와서 이 꽃을 보았을 때 이 꽃은 빛깔이 분명하게 되었다. 이 꽃은 당신의 마음 외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사람에게 의식되지 않을 때 그 꽃은 고요히 그대로 있었지만, 사람이 의식했을 때 비로소 아름답다분홍이다빨갛다 등의 평가와 판단으로 인하여 꽃은 꽃 노릇을 하게 된다. 사물은 인간의 의식과의 관계에서 그 가치가 주어지고 세계질서에 참여하게 된다. 이것이 마음 외에 사물은 없다는 근본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