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백자와 세종대왕 그릇 역사, 고려 청자, 조선 초기 분청사기, 조선의 자기(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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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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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조선백자와 세종대왕
-가장 조선에 가까운 조선의 그릇-
차례
서론
본론
1. 그릇의 역사
2. 고려의 청자
3. 청자에서 백자로
4. 조선 초기의 그릇 분청사기
5. 조선의 자기 (백자)
6. 조선자기의 제작방식
7. 세종 이후의 조선 백자
결론
서론
일반적으로 고려의 그릇은 청자, 조선의 그릇은 백자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단순히 이 변화를 시대의 한 추이로만 해석할 수 없는 것이 그 숨은 바탕에 세종대왕의 노력이 숨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이야 그릇이라는 것은 단순히 음식을 담는 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옛사람들에게 그릇은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었다.
대개 물건이 오래가거나 빨리 없어지거나 손상되거나 온전하게 되는 것은 사람의 수습에 있는 것이지 그릇의 두껍고 얇음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릇을 믿고 방심하기보다는 차라리 그릇을 아끼고 조심하는 것이 훨씬 낫다. 그러므로 대개 혼례잔치나 나라의 사신대신이 제향 때 하인들의 손에서 얼마나 많은 그릇이 파손되는지 모른다. 이것이 어찌 그릇 때문이겠는가. 처음에는 (그릇 만드는)솜씨가 거칠어서 이에 익숙해진 백성들이 거칠어졌고, 처음에 그릇이 거치니 마음 또한 거칠어져 점점 풍속이 되어 버렸다. 하나의 자기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나라의 만사가 모두 이것을 닮는다. 그 기물 기물이 작다고 여겨 소홀히 할 수 없음이 이와 같다.
[북학의] 초정 박제가
물론 이 박제가의 글은 조선 후기에 쓰여 졌으나 조선 사람의 그릇 생각하는 마음이 지금과는 사뭇 달랐음을 시사한다. 그릇 하나의 만듦이 그 사용하는 사람의 됨됨이까지 바꾸어 종국에는 나라의 운명까지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이러한 관점은 조선 사람들이 그릇이라 하는 것을 단순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또한 그 당시에 중국에서 백자가 유행하고 있었다는 단순한 이유와는 별개로 조선이 고려와는 다르게 조선만의 그릇을 선택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지금부터 고려청자에서 분청사기기간을 지나 조선이 어떻게 제일 품질의 백자를 생산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자.
본론
1. 그릇의 역사
그림 중국 은왕조 고령토 도기
그릇의 역사는 어떻게 하면 더 청결한 식기에 담아 음식을 섭취할 것인가에 대한 인류의 싸움이었다. 식물의 잎 등에 담아 먹는 것은 1회용이라는 문제가 있었고 유리그릇은 만들기도 힘들거니와 너무 비쌌다. 돌그릇은 제작방식이 어렵고 적당한 재료를 얻기가 힘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흙을 구우면 단단하게 변한다는 것을 알고 식기로 사용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섭씨 800도 정도에서 구운흙은 수분을 흡수해서 음료를 담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위생의 문제점도 함께 안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해결에 가장 가깝게 다가간 나라는 바로 은나라(BC1600~BC 1046)였다. 이미 이 시기에 중국은 다른 문명보다 훨씬 더 높은 온도로 토기를 구워내 도기를 생산하고 사용했다. 더구나 잿물을 유약처럼 발라 구우면 그 표면이 매끈해져 수분을 흡수하지 않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도자기의 시작이며 이러한 잿빛의 도기들은 한나라(BC 202∼AD 220)때에는 1300도에 달하는 온도까지 올릴 수 있는 가마를 지어 드디어 자기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의 식기를 생산하게 된다. 아직은 청자유가 아닌 녹유를 시유하는 수준에서 머물렀지만 중국의 도자기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여 곧 청자라는 그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식기를 세계 곳곳에 천하제일 명품으로 수출하게 된다.
2. 고려의 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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