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패망과정과 신라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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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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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가야의 패망과정과 신라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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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본 론
1. 5~6세기 가야국의 흥성과 멸망과정
2. 가야 병합의 신라사적 의미
결 론
< 서 론 >
신라의 삼국통일은 고대사회의 획기적 사건으로 오랫동안 주목을 받아왔다. 앞의 말에서 보듯이 ‘통일’을 말할 땐 항상 ‘삼국’이란 수식어가 따른다. 이것은 ‘가야’가 통일의 대상에 포함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가야가 고대왕국으로 성립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왕국의 통일을 의미하는 신라의 통일논의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가야의 병합이 신라의 통일에 있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의 연구가 가야의 발전과 멸망의 과정속에서의 대외관계연구가 주류를 이룬 경향을 보면 이러한 사실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신라의 가야 병합은 그 자체가 하나의 통일 과정이며 그 의미를 되돌아 보건대 결코 쉽게 넘길 수 있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필자는 이 글에서 신라의 가야 병합과 그 결과로 나타난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 본 론 >
1. 5~6세기 가야국의 대외관계와 멸망과정
가야는 고구려군의 가야지역 남하와 관련하여 크게 세력변화를 겪는다. 김해, 부산, 밀양 등 금관가야를 중심으로한 전기의 낙동강 하류의 세력이 고구려군의 남하이후 합천, 고령 등 대가야세력 중심으로 재편된다. 여기서는 고구려 남하이후, 곧 5세기이후 대가야 중심으로 재편된 세력을 중심으로 대외관계와 멸망과정을 알아보고자한다.
5세기 가야의 상황
고구려군 남하이후 대가야는 높은 농업생산성과, 제철 능력 등 여러 유리한 조건등을 바탕으로 가야 지역의 새로운 세력으로 대두하였다. 이때를 즈음하여 대가야는 활동을 전개하는데 5세기후반에 와서는 여러 계통의 문헌 기록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 첫 번째로 『南齊書』권58 東南夷傳의 가락국조의 기록이 눈에 띈다.
가락국(伽羅國)은 삼한의 종족이다. 건원(建元) 원년에 국왕 하지(荷知)의 사신이 와서 공물을 바쳤다.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널리 헤아려 비로소 등극하니 먼 오랑캐에까지 교화가 미치는구나. 가라왕 하지가 바다밖에서 방문하여 동쪽 멀리서 폐백을 바쳤다. 가히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을 제수한다”하였다.
대가야가 내적외적 제약을 극복하고 남제와 직접 교역하여, 보국장군본국왕이라는 벼슬을 받았다는 점은 가야지역에 신라나 백제에 의존치 않는 독립적인 지배권력이 성장했다는 증거이다. 『삼국사기』신라 본기에 따르면, 그후 가야는 481년에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신라 호명성(狐鳴城)등 7성을 빼앗고 미질부 (彌秩夫, 포항시 흥해읍)로 진군하는 것을, 백제와 함께 원병을 보내 신라군을 도와 막았다 『三國史記』권3, 新羅本紀 3, 소지마립간 3年 3月
“삼월에 고구려가 말갈로 더불어 북변에 침입하여 호명등 일곱 성을 취하고 다시 미질부로 진군하므로 아군은 백제가야의 구원병으로 더불어 길을 나누어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