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어학 러일전쟁과 일본의 대한정책 - 외교와 사상을 중심으로

 1  인문어학 러일전쟁과 일본의 대한정책 - 외교와 사상을 중심으로-1
 2  인문어학 러일전쟁과 일본의 대한정책 - 외교와 사상을 중심으로-2
 3  인문어학 러일전쟁과 일본의 대한정책 - 외교와 사상을 중심으로-3
 4  인문어학 러일전쟁과 일본의 대한정책 - 외교와 사상을 중심으로-4
 5  인문어학 러일전쟁과 일본의 대한정책 - 외교와 사상을 중심으로-5
 6  인문어학 러일전쟁과 일본의 대한정책 - 외교와 사상을 중심으로-6
 7  인문어학 러일전쟁과 일본의 대한정책 - 외교와 사상을 중심으로-7
 8  인문어학 러일전쟁과 일본의 대한정책 - 외교와 사상을 중심으로-8
 9  인문어학 러일전쟁과 일본의 대한정책 - 외교와 사상을 중심으로-9
 10  인문어학 러일전쟁과 일본의 대한정책 - 외교와 사상을 중심으로-10
 11  인문어학 러일전쟁과 일본의 대한정책 - 외교와 사상을 중심으로-11
 12  인문어학 러일전쟁과 일본의 대한정책 - 외교와 사상을 중심으로-12
 13  인문어학 러일전쟁과 일본의 대한정책 - 외교와 사상을 중심으로-13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인문어학 러일전쟁과 일본의 대한정책 - 외교와 사상을 중심으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러일전쟁과 일본의 대한정책
- 외교와 사상을 중심으로 -
1. 들어가며
러일전쟁은 한국과 만주 지역을 두고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벌이던 신경전이 정점에서 표출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두 국가는 전쟁을 벌이면서도 자국 영토 안에서는 피해가 하나도 없었고, 전쟁이 끝난 다음의 전후 처리에 있어서도 자국 외의 문제를 중심으로 타협을 했다는 측면에서 다른 전쟁에 비해 상대적으로 특이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전쟁의 와중에 한국은 일본에 의해서 보호국화의 길을 걷게 되었던 만큼 마냥 타국 사이에 있었던 남의 일로만 넘겨짚을 수는 없다. 러일전쟁이 어떠한 배경과 맥락 하에서 발생하게 되었고, 전쟁을 통해서 둘러싼 환경과 상황 그리고 조건이 어떻게 바뀌어 나갔는가에 대해서 냉철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소리이다.
이 글에서는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전 시기부터 전쟁이 끝난 후 한국이 일본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하게 되는 韓日協商條約(제2차 한일협약, 을사조약 등으로도 지칭)을 체결하게 되기까지 일본이 외교상으로 어떠한 정책노선을 견지하고 있었는가를 주로 개전논의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하며, 일본 내부적으로는 전쟁이 발발할 당시 어떠한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는가에 대해서 이 당시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었던 아시아주의를 중심으로 하여 각종 연구성과들을 참고해 가면서 정리해 보고자 한다.
2. 일본 내 開戰論의 推移
일본이 전쟁이라는 수단을 선택하게 된 과정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외교정책을 실제로 구현해 가는 內閣에서의 의사결정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의 정세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내각에 영향을 끼쳤던 在野의 여론 동향과 그것의 수렴 과정이다. 러일전쟁에 대한 개전론이 어떻게 전개되어 나갔는지는 이 두 가지를 중심으로 기존의 연구성과들을 참고하여 정리해 보도록 한다. 그리고 이 두 부분의 근저에 공통적으로 흐르고 있는 사상적 기반으로서의 “아시아주의”에 대해서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1) 內閣에서의 외교노선 변동 과정 의화단사건이 일어났던 시기부터 러일전쟁이 발발하기까지 일본 내 정책결정자들의 정세 인식과 대응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똑같지는 않았고, 정치에 등장한 세대별로도 대응양상이 상이했다는 측면에서 세분화시켜 접근하면서 일본의 대외정책을 설명하는 최근의 연구자로는 조명철을 들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전반적으로 그의 글을 많이 참고하여 정리하였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획득하게 된 대만을 식민지로 경영하게 되면서 北守南進論의 대륙정책을 기조로 삼게 된다. 이는 일본이 한반도를 통해서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메이지유신 이래의 외교전략을 접어두고, 새로운 식민지 대만을 통해서 중국의 남부로 세력을 확장해야 한다는 외교전략이었다. 조명철, 「러일전쟁과 동아시아 국제질서」, 역사학회 編, 『전쟁과 동북아의 국제질서』, 일조각, 2006, 352쪽. ; 북수남진론과 관련된 자세한 논의는 조명철, 「20세기초 동아시아 국제정세와 일본의 대륙정책」, 『日本歷史硏究』14, 日本史學會, 2001.을 참고할 것.
일본이 북수남진론의 외교노선을 취하게 된 데에는 청일전쟁 이후 삼국간섭을 통해서 그들의 중국 대륙 진출을 좌절시키고, 대한제국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러시아의 존재를 강하게 의식했던 것이 크게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북쪽으로의 대륙진출이 러시아에 의해서 방해를 받게 되자 일단은 획득하였던 대만이라는 식민지를 거점으로 하여 중국 남부 지역으로의 진출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일본의 이러한 북수남진론 노선은 의화단사건 진압 과정에서 福建省의 厦門港 점령과 같은 적극적인 행동으로 표출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영국이나 미국 등의 강력한 항의로 인하여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곧 북수남진론의 좌초를 의미 조명철, 앞의 글(2001), 109~110쪽.
하는 것이었다.
하문항 점령의 실패로 북수남진론이 더 이상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외교 일선에서 활동하고 있던 주한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나 주러공사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는 조선문제와 만주문제로 시선을 돌릴 것을 주장하게 된다. 하야시는 한국에서의 일본의 이익을 보호증대하기 위해서 군대를 동원하여 인천이나 거제도를 점령하자는 의견을 개진하였으며, 고무라는 만주문제와 한국문제를 하나로 묶어서 일괄처리하자는 ‘滿韓交換論 고무라가 의화단사건 당시 제기한 만한교환론의 핵심은 일본이 만주에서 러시아의 이익이 현실로 나타나기 전에 미리 그것을 인정해주는 대가로 한국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는 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