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사 상허 이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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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현대문학사 상허 이태준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상허 이 태 준
1. 생애
호는 상허常虛. 1904년 11월 4일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서 부친 이창하와 모친 순흥 안씨의 1남 2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난다. 그의 부친은 구한말 덕원 감리서 주사로 봉직한 관리 출신이면서 개화당에도 관계하였던 지식계층에 속한다. 상허는 불과 여섯 살이란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고, 모친마저 1912년 돌아가시자 이태준은 아홉 살이란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고 만다. 타향에서 부모를 모두 잃은 상허는 두 누이와 함께 외조모의 손에 이끌려 용담으로 돌아온다. 그가 “시문독보”, “추월색”,“옥중가화”, “해당화”등 문학작품을 읽은 것도 바로 이 무렵인데, 톨스토이의 “부활”을 초역한 “해당화”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192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니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상지대학 예과에서 공부했다. 이태준이 작가로서 인정을 받으며 왕성한 창작활동을 벌이던 시기는 1931년 이후다. 그는 “조선중앙일보”의 학예부장에 임명되고 문단에서의 교류도 활발하여 “구인회”를 결성하면서 카프의 목적문학에 반대하는 등 자신의 문학적 색채를 뚜렷이 드러낸다. 1933년 구인회 회원으로 가입했고, 카프의 목적문학에 반대하는 등 자신의 문학적 색채를 뚜렷이 드러낸다. 1938년을 고비로 이태준은 자신의 삶과 문학을 근본적으로 반성하는 기회를 갖는다. 1939년쯤 이태준은 지금까지의 문학에 대해 반성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의 소설 취진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최태응, 곽하신, 임옥인 등을 배출했다. 8.15 해방 이후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임화, 김남천 등과 조선문학건설본부를 조직하여 활동하다 월북했다.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 국가학위수여위원회 문학 분과 심사위원 등을 역임했다. 1947년 방소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소련기행에 나섰고 6.25 전쟁 때는 북한의 종군작가로 참가했다. 1953년 남조선노동당 인물들과 함께 숙청될 뻔했으나 가까스로 제외됐고 1955년 소련파가 숙청될 때 가혹한 비판을 받고 숙청됐다. 함경남도 노동신문사 교정원으로 일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1953년 숙청이 끝나 가을 자강도 산간 협동 농장에서 막노동을 하다 1960년대 초에 병사했다는 증언도 있지만 역시 확인되지 않았다.
1925년 (시대일보, 1925.8.13)로 등단한 뒤, 여러 단편 소설을 발표했다. 그는 특히 문학의 자율성과 언어의 정련을 강조해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몇 번을 되풀이해 고쳤는데 이런 점에서 그의 소설은 한국문학사에서 소설의 기법적 완숙과 예술적 가치를 높인 것으로 평가된다. 해방 후에는 초기와는 달리 정치, 사회 현실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선전, 선동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해방 직후의 어지러운 상황에서 자신의 이념적 변화를 형상화한 나 북한의 토지개혁 과정을 그려낸 등이 그러한 작품이다. (1934), (1937), (1938) 등의 소설집과 수필집으로 등이 있고 이 외에 한 시대의 뛰어난 저서로 평가 받는 , 가 있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작가이며 문단의 헤게모니를 장학했던 이태준에 대한 평가는 남북한 모두에서 미비한 편이다. 남한에선 월북 작가라는 이유로 1980년대 후반까지 그의 작품과 이야기가 금기시 되었으며, 북한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남로당의 숙청과 더불어 그의 문학사적 위치를 폄하하며 그에 대한 연구가 전면 중단된 상태다.
2. 문학 활동과 문학적 특징
1) 작품 속에 반영된 삶,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냉대
이태준의 생애와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그의 고아체험과 빈곤했던 초창기 문학 활동 시기의 체험이다. 그의 부친 이창하는 당시 상당한 식자층에 속했던 사람으로서, 나라를 개혁하려는 일을 도모하다 실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한 개화당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태준의 부친은 개화파라는 이유에서 친일분자로 오인돼 그의 일가는 1909년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지만 그 곳에서 아버지는 폐결핵으로 이태준이 6살이 되던 해 타계한다. 그 후 고국으로 돌아오지만 1912년 겨울, 그의 어머니마저 죽게 돼 이태준을 비롯한 세 남매는 고아가 된다. 이 때 이태준은 9살이었다.
이후 이태준은 친척집에 기거했지만 생활의 불편함과 주위의 동정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매우 반항적인 기질을 보였다. 1920년 배재학당에 응시, 합격했으나 입학금이 없어 등록을 못하고 배회하다 이듬해 휘문 고등 보통학교에 어렵게 학비를 조달해 다니게 되지만 동맹휴교 사건에 주모자로 관여하게 돼 퇴학당했다. 이후 친구의 도움으로 일본에 유학하게 된 그는 매우 어려운 생활 속에서 1925년 「오몽녀」를 집필한다. 그의 동경 생활은 가난과 병고, 고독감으로 점철돼 매우 암담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결국 어려움을 감당하지 못 하고 1927년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서울에서 그는 여러 신문사와 모교에 취직을 의뢰했지만 냉담한 반응만이 돌아왔다. 그는 파고다 공원 주위를 서성거리며 방황했다. 이와 같은 고하체험, 경제적 빈곤, 사회적 냉대의 경험 등 순탄하지 못했던 그의 생활과 삶은 그대로 그의 소설 속에 반영돼 나타났다. 「고향」, 「감사」, 「사상의 월야」등 여러 소설에서 그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서사구성이 주조를 이루며 이는 이태준의 소설 미학에서도 묻어난다.
2) 순수문학의 기수, 구인회와 《문장》활동
이태준을 순수문학의 ‘기수’라 하는 것은 바로 순수예술 운동을 추구했던 구인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으며 일제 말기 순수문학의 연장선에 놓이는《문장》의 주간, 편집인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구인회는 카프에 대한 검거가 몰아치던 1933년 8월, 이태준, 정지용, 박태원, 이효석, 이상 등 작가 9명이 경향문학에 반대하여 순수예술 추구를 취지로 결성한 문학친목단체로 당시 문단에 순수예술옹호의 분위기를 형성했다. 비교적 소극적이었던 활동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 이후의 민족문학의 주류를 형성하는데 기여하고 근대문학의 성격을 현대문학으로 전환, 발전시킨 점에서 문학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구인회의 순수문학운동의 선두에 섰던 이가 바로 이태준으로 구인회의 결성, 활동까지 그는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한편 일제 식민통치가 민족말살정책이란 극한상황으로 치닫는 1939년 2월《문장》이 탄생한다. 《문장》은 친일적인 색채가 옅은 순수문학을 지향하면서 전 문단인을 수용하는 월간문학지로 나아갔다. 서구 문화의 도입과 신인 발굴에도 힘쓰는 동시에 《문장》이 주력한 것은 국문학 고정의 수록을 통해 민족문화유산의 옹호로 이는 이태준과 정지용의 순수문학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이태준은 《문장》의 주간 편집인으로 활동하며 당대 문단을 망라하는 문예지의 실질적인 수장이 되어 문단의 헤게모니를 잡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