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환(吳章煥)론 - 오장환의 시적경향 & 이식된 근대 도시문명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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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 오장환의 생애와 활동
오장환은 1918년 5월 15일 충북 보은군 회북면 중앙리에서 해주 오씨 오학근(吳學根)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의 생업은 농업으로 추정되고 모친은 부친과 22세의 차이가 나는 첩이었다. 오장환의 큰 어머니, 곧 아버지의 본처인 이민석(李敏奭)이 사망하자 2년 뒤 1931년 첩실로 있던 오장환의 생모 한학수와 재혼신고 함으로써 서출로 신고된 5남매(남환(여), 성환(남), 장환(남), 용환(여), 영환(남)) 가 비로소 호적에 오를 수 있었다. 형제들도 많은 편이어서 누나와 형이 각각 둘이고, 밑으로 남동생과 여동생 한명씩을 두었다. 1927년에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19세 되던 해인 1936년에 서울로 다시 이사를 하는데 이러한 잦은 이사와 서출이라는 가정환경은 오장환의 성격과 시세계의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1930년 안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1년 중동학교 속성과 수료 후 4월에 휘문고보에 입학했다. 이 무렵부터 오장환은 시작 활동이 비로소 시작되었고, 시인 정지용과의 만남도 이루어졌다. 그는 휘문고보 3학년 때인 1933년 11월에 그의 첫 번째 시 「목욕간」을 《조선문학》에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장시 「전쟁」도 이 때 쓴 것이다. 이어서 다음해에 ≪조선문학≫에 연작시 「카메라·룸」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1935년 3학년 2학기를 마치고 자퇴하고 만다. 자퇴 사유는 동경유학으로 되어 있지만 시에 심취하고 문우들과 어울리면서 공부를 소홀히 해 학업성적이 낙제할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김학동,『오장환 평전』, 새문사, 2004, 39쪽.
오장환이 동경에 체류했던 기간은 1935년 4월부터 1940년까지로 간헐적으로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는 지산중학교를 수료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시인부락】, 【낭만】의 동인으로 참여하면서 서정주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시인부락】은 서정주 등과 동인활동을 주도하였고 2차의 동인지를 간행하였으며 김달진, 김동리, 김상원, 김진세, 박종식, 여상현, 이성범, 임대섭, 정복규, 함형수 등 12명이 참가하게 된다. 여기에 참여한 것으로 오장환은 생명파 시인으로 불려지게 된다. 또한 【낭만】은 민태규 등이 중심이 되어 이용악, 임화, 박세영, 윤곤강, 이찬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그는 1937년 3월에 다시 일본 명치대학에 입학하였고, 【자오선】 【자오선】은 1937년 11월 창간되었다. 오장환은 여기에 「황무지」, 「신부의 노래2」등을 실었다.
동인으로 참여하여 시작 활동을 하였다. 그해 8월 첫 시집 『성벽』이 자비로 풍림사에서 간행되었다. 오장환은 다음해 아버지의 사망으로 명치 대학 전문부를 중퇴하고 귀국한다. 물려받은 유산을 기반으로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 남만서방을 경영하였고 여기서 그의 두 번째 시집인 『헌사』를 비롯하여 김광균의 첫 시집 『와사등』과 서정주의『화사집』등을 간행했다는 의의를 지닌다. 오장환은 스스로 ‘불운의 극’이라고 표현하면서 극도로 어려운 생활고 속에 학업을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오장환 시에 나타나는 민중적 계층의식의 편린도 이러한 생활 체험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남만서방을 잠시 경영하기도 했으나 별 직업 없이 서울과 동경을 오가며 방랑생활을 지속했다. 동경 유학에서 해방 때까지의 오장환의 삶은 문학과 술과 방랑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오장환의 이러한 생활의 이면에서 문학청년으로서의 정렬과 고뇌의 모습도 엿볼 수 있다. 오장환은 절망적인 생활에서 자기를 구제할 수 있었던 최후의 보루는 바로 시 쓰기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극빈에 시달리며 학업까지 중단하는 상황에서도 시집 모으기에는 열성적이었으며 본격적인 시작 활동은 《낭만》, 《자오선》, 《시인부락》등의 동인 활동에서 비롯한다. 김학동,『오장환 평전』, 새문사, 2004, 43쪽.
오장환은 해방을 신장병으로 인하여 병원 입원실에서 맞이했다. 그의 시집 『병든 서울』의 시편들은 8·15를 계기로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46년 2월에 결성된 좌경문학 단체 《조선문학가동맹》에 참가하여 역시 시부 위원으로 활동하고, 역시집인 『에세-닌 시집』을 간행하였다. 오장환은 보들레르, 베를레르, 랭보, 말라르메 등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을 위시하여 엘리엇, 니체, 리드 뿐만 아니라 특히 에세닌 시에 심취해 있었다. 오장환의 향토성을 소재로 한 고향시편들 상당수가 에세닌의 시와 연관되는데 에세닌 시의 번역이 이를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김학동, 오장환 평전, 새문사, 2004.)
동년 문학가 동맹 서울시 지부 결성 대회에 참가하며 동 지부 사업부 위원으로 위촉된다. 김학동,『오장환 평전』, 새문사, 2004, 61쪽.
이와 같은 좌익 문학 활동은 지속되어 문학대중화운동 위원회 위원이 되기도 하고, 각종 정치 집회에 참석하여 연설을 하거나 축시를 낭독하기도 하였다. 47년 2월 장정인(張正仁)과 결혼했고 그해 6월, 1937년 7월에서부터 1945년 8월 사이에 쓴 작품들을 묶어 시집 『나 사는 곳』으로 간행하였다. 1945년에서 1947년은 오장환 생애 최고로 작품활동이 왕성했던 시기로 두 권의 창작시집과 한 권의 역시집을 간행하는 등 문단활동이 두드러졌다.
좌익계 문예 운동에 가담한 오장환은 1948년 북한의 북조선 문학예술 총동맹의 기관지인 ≪문학예술≫ 4월호에 실린 「2월의 노래」에 의해 그의 월북이 확인되었다. 월북한 후 48년 신병치료차 모스크바 여행을 하였고 625 당시 종군작가단의 일원으로 남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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