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와 당나귀 이야기 속의 소 농사신 풍요 상징

 1  소와 당나귀 이야기 속의 소 농사신 풍요 상징-1
 2  소와 당나귀 이야기 속의 소 농사신 풍요 상징-2
 3  소와 당나귀 이야기 속의 소 농사신 풍요 상징-3
 4  소와 당나귀 이야기 속의 소 농사신 풍요 상징-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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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소와 당나귀 이야기 속의 소 농사신 풍요 상징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소와 당나귀

Ⅰ.시작하며
Ⅱ.소
1.이야기 속의 소
1) 농사신으로서의 풍요의 상징
2) 신성한 제물과 축귀의 상징
3) 근면, 우직, 충직의 상징
4) 유유자적, 여유와 한가함의 상징
5) 고집, 어리석음, 아둔함의 대명사
6) 소의 변신담-통과의례
2. 생활 속의 소
Ⅲ.당나귀
1.당나귀의 상징-미련함
2.당나귀의 상징-유유자적
Ⅳ.마치며
Ⅰ. 시작하며
우리나라에 소가 들어온 것은 불분명하지만 기원전 1, 2세기 경으로 알려져 있으며 부여에서는 6가지 가축을 사육하고 관직이름으로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삼한시대에는 순장용이나 제사용으로 소가 사육돼 이미 소를 이용한 농경활동이 이뤄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5세기에 만들어진 고구려의 고분에는 수레를 끌고 있는 소의 그림이 나오고, 7세기초에 만든 고분에는 쇠머리를 한 농사신(農事神)의 모습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 역사가 오랜만큼 소와 관한 일화도 많은데 어느 소가 더 일을 잘하느냐는 질문에 귓속말로 대답했다는 황희 정승과 촌부의 일화에서도 소가 등장하고 수로부인(水路夫人)에게 헌화가(獻花歌)와 함께 꽃을 꺾어 바친 노인도 암소를 끌고 있었다. 소는 농사를 돕는 동물이 아니라 우리 민족에게 특별함을 지닌 동물인 것이다. 자료를 구하는 것이 어려웠지만 당나귀는 소와 비슷한 상징을 가지는 부분이 있었다.
이 글에서는 우리나라의 이야기, 민속놀이, 종교 등에서 소와 당나귀가 어떻게 그려지고 상징되는지, 소와 당나귀에 대한 우리 민족의 관념은 어땠는지, 알아봄으로써 우리 선조들의 생각에 다가가 보기로 한다.
Ⅱ. 소
1.이야기 속의 소
1) 농사신으로서 풍요의 상징
제주도 삼성혈 신화, 고구려 고분 벽화 등에서는 소가 농사 신으로 인식되고 있다. 새해에는 풍년을 기원하며, 가을에는 한 해 동안 고된 농사일에 대한 위로와 풍년을 가져오게 한데 대한 감사로 소에 대한 각종 풍속과 민속놀이가 행해졌다. "꿈에 황소가 자기 집으로 들어오면 부자가 된다"라는 속신어나 "소의 형국에 묏자리를 쓰면 자손이 부자가 된다"는 풍수지리설 등을 통해서 볼 때 분명 소는 풍요를 가져다주는 부의 상징으로 인식했다.
탐라에는 태초에 사람이 없었다. 옛 기록(동문선, 고려사, 영주지)에 이르기를 기이하게 빼어난 산이 있는데 한라산이라 한다. 구름과 바다가 아득한 위에 완연히 있는데 그 主山(주산)인 한라산이 그의 신령한 화기를 내리어 북쪽 기슭에 있는 모흥이라는 곳에 三神人(삼신인)을 同時(동시)에 탄강 시켰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4,300여년 전의 일이다.
三神人이 태어난 곳을 모흥혈(毛興穴)이라 하는데 三神人이 湧出(용출)하였다 하여 三姓穴(삼성혈)이라 하며 3개의 地穴(지혈)이 있다. 이 神人들을 이름하여 乙那(을나)라 하며 세성씨의 시조이시며 탐라국을 개국하시었다. 그들의 모양은 매우 크고 도량이 넓어서 인간사회에는 없는 신선의 모습이었다. 이 삼신인은 가죽옷을 입고 사냥을 하는 원시의 수렵생활을 하며 사이좋게 살았다.
하루는 한라산에 올라가 멀리 동쪽 바다를 보니 자주색 흙으로 봉한 木函(목함)이 파도를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그 목함을 따라 지금의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에 이르러 목함을 열어 보았다. 그 안에 알 모양으로 된 둥근 玉函(옥함)이 있었으며 자주빛 옷에 관대를 한 使者(사자)가 있었는데 그 사자가 玉函을 연즉 靑衣(청의)를 입고 姿色(자색)이 출중하고 稟質(품질)이 端雅(단아)한 공주 세사람이 좌석을 整齊(정제)하여 같이 앉았고, 또 우마와 오곡의 종자를 가지고 와서 연혼포의 해안 언덕에 내 놓으니 삼신인이 자축하여 말하기를 이는 반듯이 하늘에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것이다하여 기뻐했다. 使者가 두 번 절하고 엎드려 말하기를 나는 동해 碧浪國(벽랑국)의 사자 올시다. 우리 임금님이 세공주를 낳으시고 나이가 성숙함에도 배필을 정하지 못하여 한탄하던 차에 하루는 紫宵閣(자소각)에 올라 서쪽 바다를 바라보니 자주빛 기운이 하늘에 이어지고 상서로운 빛이 영롱한 가운데 명산이 있는데 그 명산에 三神人이 강임하여 장차 나라를 세우고자 하나 배필이 없음으로 이에 臣(신)에게 명하여 세분 공주를 모시고 오게 하였으니 伉儷(항려)의 예식을 갖추어 큰 國業(국업)을 성취 하시옵소서하고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는 동쪽 하늘로 사라져 버렸다. 이에 三神人은 祭物(제물)을 정결하게 갖추고 목욕재계하여 하늘에 고하고 각기 세 公主와 혼인하여 연못 옆 동굴에서 신방을 차리고 생활하니 인간으로의 생활이 시작이며 이로써 농경사회로 발전하고 정주의 기초가 됐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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