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未堂) 서정주 - 작품 경향과 변모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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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미당(未堂) 서정주
1. 생애
서정주는 1915년 5월 18일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속칭 질마재 질마재의 ‘질마’는 마을을 넘어서는 고개의 모양이 길마(수레를 끌 때 말이나 소 등에 안장같이 얹는 제구)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질마’는 길마가 구개음화 된 상태의 명칭이다.
)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미당이며, 아호는 궁발이다. 아홉 살까지 마을 서당에서 한학 수업을 받으며 전래동화, 민담, 전설 등과 같은 옛날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성장했고 이러한 바탕과 질마재 마을의 유년시절 체험 등이 후일 서정주 문학의 한 원형을 이루게 된다. 아홉 살 때 줄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6년 과정을 5년만에 수료한다. 이곳에서 3학년 때 일본인 여선생 ‘요시무라 아야코로’부터 글재주가 있다고 칭찬을 받았으며, 이것이 후일 창작의 길에 들게 하는 한 계기가 된다. 소년 미당은 요시무라 선생에게 꺾어 드렸던 라일락을 생각하며 이 때의 물빛 라일락 이미지로서의 그녀를 깊이 간직한다. 그녀의 초상은 시 「내 永遠은」에서 나타난다. - 서정주 외, 서정주 문학앨범, 웅진출판주식회사, 1993. p34.
1929년에는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이 때에는 사회주의공산주의 사상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때여서 상당수의 학생들이 휘말렸고, 미당 역시 참가했다. 그의 참가는 이념적인 신조에 따른 것이기보다 가난하고 불행한 이 나라 많은 민중들의 처참한 꼴을 보고 동정하는 인도주의적인 소년의 감정으로 인한 것이었고, 그의 생각으로는 마르크스나 레닌의 경제적 균배 주장이 좋은 해결책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는 1930년 11월 광주학생사건 때 주모자 중의 하나가 되어 학교를 퇴학당하고 이듬해 봄, 고창 고보에 편입학해서도 주모자가 되어 자퇴를 해야 했다. 그가 만 18세 때쯤 영향을 받은 인물은 니체와 보들레르였다. 뿐만 아니라 보들레르 이후의 프랑스 상징주의 시의 영향도 받았다. 또한 고호와 고갱의 그림도 좋아하여 그의 첫 번째 시집 『화사집』(1941)에는 그 영향의 일단을 담기도 했다. 이후 방랑생활을 하다가 선배인 배상기의 소개로 석전(石顚) 박한영 대종사의 문하에 들어가 불자가 되어 서울 성북구 안암동 소재의 개운사 대원암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불경을 공부했다. 이어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1년 만에 중퇴하고만다. 1936년 《동아일보》에 시 「벽」이 신춘문예에 당선해서 등단한다. 그 해, 11월에는 김광균, 김달진, 김동인, 김동리 등과 함께 시 전문 동인지 《시인부락》 1936년 11월에 창간하여 1937년 12월 통권 2호로 종간되었다. 초대 편집 겸 발행인은 서정주(徐廷柱)였고, 시인부락사에서 펴냈다. 국판, 30~40면이다. 동인으로 제1호 때에는 서정주·김달진·김동리·여상현·오장환·함형수·김광균 등이 참여하였고, 제2호 때에는 오화룡·이시복 등이 참여하였다.
창간호의 편집후기에서 서정주가 밝혔듯이 사람은 본래 개성과 구미가 각각 달라…우리는 우리 부락에 되도록이면 여러 가지의 과실과 꽃과 이를 즐기는 여러 가지의 식구들이 모여서 살기를 희망하였던 만큼 일정한 문학적 이념이나 방향 아래 모인 동인이라기보다는 각기 개성과 특성이 다른 시인들의 우호적인 집단이었다. 그러나 주로 인간 생명의 고귀함을 노래한 시들이 두드러져 이들을 생명파라고 하였다.
을 창간하였다. 1938년에 방옥숙과 결혼하고, 1941년에 만주에서 귀국하여 첫 시집인 『화사집』을 출간한다.
1942년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강화됨에 따라 미당은 시대 상황에 대해 체념과 달관의 자세를 가진다. 이 경향은 노자나 장자 등의 사상에 경도하게끔 만들어 1947년, 그의 대표작 「국화 옆에서」가 탄생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조선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다츠시로 시즈오’라는 창씨명으로 《매일신보》에 시 평론을 싣고 친일어용문학지인 『국민문학』, 『국민시가』의 편집 일을 맡아 본격적으로 친일작품을 양산한다. 그가 쓴 친일작품은 시, 평론, 수필, 단편소설, 르포 등 11편에 이른다.
1948년에는 정부수립과 동시에 문교부 초대예술과장이 되고 11개월 후 퇴임한다. 또한 일제 말기에 쓴 시들과 해방 뒤에 쓴 시들을 함께 수록해 두 번째 시집 『귀촉도』(1948)를 낸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미당은 구상 시인과 더불어 일선부대에 나가 진중 신문을 편집했고, 이 무렵 실어증에 빠져 지내기도 한다. 14후퇴 때 그는 전주로 내려가 전주고등학교 국어교사를 맡았고 이때부터 ‘신라’에 골몰하여 한 동안 신라와 삼국의 역사책을 읽고 지냈으며, 그의 이러한 태도가 시로 응집되어 나타난 것이 시집 『신라초』(1960)와 『동천』(1968)이다. 그리고 그는 여러 문인 협회와 단체의 요직에 서고 강단에서도 활동하는 등 남한 문단의 중심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1960년에는 동국대학 국문과 강사가 되었고, 제 3시집 『서정주시선』으로 미국의 아세아 재단에서 주는 ‘자유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후로 미당은 고향 질마재에 전해 내려오는 설화들을 소재로 한 『질마재 신화』(1975년)를 내고, 1977년과 1984년 2차에 걸쳐 세계일주를 하게 된다. 이 경험은 『서으로 가는 달처럼』, 『미당 세계 방랑기』, 『떠돌이의 시』 등에 담겨 있으나, 이전의 시만큼 정제되어 있지 못하다. 여행에서 돌아와 서양에 대한 환멸감을 느끼고 민족에 대한 자긍심이 생기면서 3년간 골몰해 쓴 시집이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1982)이다. 1981년에는 전두환 대통령 후보를 위한 TV 지원 연설을 하는데, 이 일로 문단 안팎의 거센 비난을 받는다. 2000년 10월에 부인이 사망하고, 뒤이어 12월 24일 별세한다. 2002년 2월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이 자체 조사하여 발표한 일제하 친일 반민족행위자 1차 명단에 포함되었다.
2. 작품 경향과 변모 과정 (발간 시집 ① 화사집(1941)
② 귀촉도(19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