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주체적 민주적 사상가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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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문과학 주체적 민주적 사상가 함석헌]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목차
함석헌 (실존인물)
생애
업적
해방 직후의 느낌
나라에 바란 점
기회주의적인 공무원 (가상인물)
생애
해방 직후의 느낌
나라에 바란 점
나의 생각(느낀 점)
주체적, 민주적 사상가 - 함석헌
생애
함석헌은 190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사소한 말이라도 그냥 대충 넘기지 않고 깊이 생각하는 성격이었다. 또한, 목사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고 우직했다. 1913년 함석헌은 의사가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덕일 소학교에서 양시 공립 보통학교로 전학하였고, 1916년에는 평양 고등 보통 학교에 진학했다. 1919년에는 3·1운동을 위해 태극기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만세를 불렀다. 1921년에는 이승훈 선생의 뜻에 감명하여 민족 사학인 정주의 오산학교에 편입학 하였다. 함석헌 자신은 오산학교에 입학하여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유영모 교장 선생님을 만난 것이라고 했다. 유영모는 교육자이자 그리스도 교인 이었다. 이 유영모가 오산학교에 교사, 교장으로 재직한 것이 오산학교가 기독교 학교가 된 시발점 이었다. 유영모는 함석헌에게 많은 책을 읽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사람이다. 그래서 함석헌은 서양과 동양을 막론하고 여러 소설과 철학 책들을 읽었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1923년에는 이승훈 등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교사가 되기 위한 꿈을 가지고 공부하여 1924년 도쿄 고등 사범 학교에 합격하였다. 1928년 함석헌은 도쿄 고등 사범 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인 오산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이곳에서 우리의 역사를 정신사를 중심으로 성서적 입장에서 새롭게 해석하여 가르쳤다. 1932년에는 동인지 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를 쓰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1938년 3월, 일제의 탄압으로 오산 학교를 그만두었다. 1940년 8월에는 계우회 사건으로 평양 대동 경찰서에 끌려가 약 1년간 고통을 당하고 1942년에는 성서 조선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하였다. 1945년 8월, 해방을 맞아 지역 자치위원회 활동을 하고 11월에는 신의주 학생 사건의 책임자로 소련군 사령부에 체포되었다. 1947년, 주위 사람들의 강권으로 고향을 등지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1948년에는 매주 YMCA 강당에서 일요 종교 집회를 가졌고, 1956년, 친지들의 도움으로 서울 원효로에 사택을 마련하고 에 집필을 시작했다. 1957년 천안에서 ‘씨알 농장’을 경영하였고, 58년에는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로, 서대문 형무소에 20일간 구금되었다. 61년에는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발표하여, 5·16 군사정변을 정면 공격했다. 62년 2월,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을 여행하였고 그 뒤 10개월간 퀘이커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63년, 오산학교, 대광학교 등에서 강연을 하였다. 67년에는 장준하가 국회 의원에 옥중 출마하는 것을 도와서 당선시켰다. 70년에는 창간호를 발행하여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74년, 윤보선·김대중과 함께 ‘민주 회복 국민 회의’를 만들고 대표 위원이 되었다. 76년, ‘민주 구국 선언’ 사건으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았다. 79년, 퀘이커 협회 초청으로 미국 종교 대회에 참석하여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하였다. 또한, YWCA 위장 결혼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1년에 형 집행 정지를 받았다. 80년에 계엄 당국에 의해 가 폐간 당했다. 이로 인해 함석헌은 많은 고통을 겪었다. 87년, 제 1회 인촌상을 수상, 상금 전액을 남강 문화 재단에 기탁하기도 하였다. 88년, 서울 올림픽 평화 대회 위원장을 맡고, ‘서울 평화 선언’을 제창하였다. 그 후 담도암 선언을 받고 수술을 하였으나 1989년 2월 4일, 89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업적
함석헌은 사상가이자 교육자이다. 한국 사상사에서 함석헌의 위치는 원효, 율곡이이, 최제우 등에 버금가는, 개화기 이후 한국이 낳은 위대한 종교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함석헌의 사상은 쓰라린 역사의 현장, 삶의 현장에서 온몸으로 현실을 극복해 가려는 실천적 과정에서 탄생한 생명 철학 사상이다. 이러한 함석헌의 사상은 체계가 없는 듯하면서도 그 속에 전체를 관통하는 당당한 논리를 갖추고 있다. 함석헌은 천대받던 서북 지방의 상놈으로 태어나 전형적인 한국인이라는 바탕 위에, 동양 사상의 핵심이며 간디를 낳은 힌두 교의 불살생 비폭력 저항사상, 원효를 낳은 대승 불교 사상, 노·장의 비판적 무위 자연사상, 한국의 하느님 신앙, 그리고 기독교 사상과 서구의 과학 정신이 하나로 녹아들게 만들었다. 또한, 억압받고 고통받는 씨알을 역사의 주체로 승화시킨 ‘씨알 사상’을 창시하였다. 여기서 ‘씨알 사상’이라는 것은 씨알 즉, 民이 중심이 되어 역사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 때 民들은 스스로 역사를 개척해나가야 하며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비우고 하나님과 자연생명에 맡김으로써 무궁한 생명을 펼칠 수 있다. 즉, 씨알 사상은 백성들 개개인을 중요한 인격체로 보고 이를 통해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상인 것이다. 이러한 함석헌은 소위 말하는 학문의 전당에서 어느 한 분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적이 없으며 학문적인 체계를 가지고 저술 활동을 전개한 적도 없다. 하지만 그는 동양과 서양의 철학을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로 펼쳐나갔다. 동시에 동과 서, 불교와 기독교, 노자의 자연주의와 성서적 역사주의, 종교적 신비주의와 합리적 과학주의가 서로 만나게 하는 사상적 논리를 폈다. 또한, 함석헌은 문필가로서 여러 책을 썼다. 특히 그 중에서도 유명한 것이 라는 책이다. 이 책은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이 심해지던 1930년대에 쓰여졌다. 이 책을 통해 함석헌은 민족이 모두 고난 속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고난을 이기고 고난의 뜻을 더 깊게 이해함으로써 이러한 고난을 역으로 새 생명을 낳는 창조적 산고로서 발전시키는 역량을 백성들이 길러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이는 더 나아가, 백성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함석헌은 인도의 간디를 존경하였다. 그를 본 받아 함석헌도 불살생, 비폭력, 평화사상을 추구하였다. 이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면이 있다. 이로써 함석헌을 주체적이고도 민주적인 사상가, 교육자, 문필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해방 직후의 느낌
함석헌 선생은 민족의 자주성을 중요시 하였다. 따라서, 타국의 간섭을 배격하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해방은 우리가 스스로 즉, 자주적으로 이루어 낸 것이 아니다. 일본이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미국 등의 연합국과 전쟁을 하다가 패하게 되었다. 이것이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한 식민통치를 끝내고 물러나는데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해방은 우리의 자주적인 힘이 아니라 연합국의 일본에 대한 승리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함석헌 선생은 이러한 해방에 대해 실제적으로는 별로 달가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함석헌 선생은 자주적으로 이루지 못한 해방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자주적인 해방은 곧, 후에 또 다른 나라의 지배와 간섭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함석헌 선생은 오히려 당장 기뻐하기 보다는 앞으로의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약간 허망하고 아쉽고 걱정스러운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나라에 바란 점
일단 함석헌 선생은 철저히 민족을 생각하고 民을 중심으로 행동하려했으므로 나라를 바라볼 때도 그 나라를 중심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나라가 나아가는 데 있어서 일제강점기와 같이 다른 나라에게 국권을 유린당하지 않고 간섭과 지배를 받지 않기를 간절히 원했을 것이다. 또한, 나라는 민주적인 토대를 빠르게 확보하여 民들이 스스로 의견을 펼치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를 바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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