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루터 1521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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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마르틴 루터 1521 1546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마르틴 루터 Ⅱ(1521-1546)
1. 보름스 회의
찰스 5세 1519년 독일 황제로 선출, 오스트리아나폴리, 네덜란드, 스페인과 그 소유의 아메리카 식민지 등의 방대한 지역을 소유했던 세력 있는 군주. 독일어 보다는 스페인어와 프랑스어에 더 유창. 중앙 정부를 강화하고 교회령과 제후령의 자율성을 축소하려는 시도는 하였으나 제후들의 지원이 요구되는 많은 전쟁에 관여하였기 때문에 끊임없이 제후들과 타협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서 프레드릭 선제후는 루터의 든든한 지원자가 될 수 있었다.
는 제국 내에서의 종교적 분란이 정치적 분열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하고 루터 문제를 다루기 위해 국회를 소집했고 루터는 소환장을 받았다. 비록 안전 통행증을 받았으나 얀 후스(안전 통행증을 받고도 결국 화형 당했음)의 운명을 생각한 루터의 친구들은 루터의 보름스 행을 만류했다. 이런 친구들의 만류에 루터는 이렇게 대답했다. “보름스의 마귀가 지붕의 기왓장 같이 많을 지라도 나는 가겠다.”
보름스 국회에서 루터는 저술한 책들에 관해 거칠게 질문 받고 취소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이에 대해 루터는 아무것도 취소하지 않겠다고 답변. 그의 유명한 답변을 하였다. “제가 여기에 서 있습니다. 저는 이 외에 다른 것은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시시오. 아멘”
2. 납치와 구금, 성경번역
1521년 4월 26일 보름스를 떠난 루터는 5월 4일 알텐슈타인 성 근처에서 예정된 공격을 받았다. 루터는 바르트부르크에 도착하였고, 은둔과 고독의 시간을 가졌다. 그는 서신에 바르트부르크 성을 밧모섬이라고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다.
바르트부르크 성의 가장 큰 공헌 중의 하나는 성서 번역 작업이다. 루터는 1522년 봄에 비텐베르크로 돌아가서 멜란히톤 멜란히톤은 비텐베르크에서 헬라어 교수로 있었다. 전에는 순수한 한 인문주의자였던 멜란히톤은 루터의 영향 아래 개종한 바울의 지지자가 되었다. 루터의 점잖은 압력 아래 멜란히톤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 문과에서 헬라어 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신과에서 교수로서 봉사하였다. 종교 개혁의 발전은 특히 학문과 교육의 영역에서 멜란히톤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의 도움을 얻어 자신의 번역을 다듬어서 1522년 9월에 독일어 신약성서를 출판하였다. 나중에 이 성서 번역본은 9월 성서로 불렸다. 이 성서는 출판되자마자 불티나게 팔려서 12월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이 번역작업은 1534까지 계속되어 비텐베르크에서 1534년에 루터 성서 번역 완역판 새 예루살렘의 열두 개의 진주를 영상화하기 위해 루터는 한 보석상을 만났다. 레위기의 희생 제사를 묘사하기 전에 그는 푸줏간 주인을 만났다. 그의 번역은 문자에 매이지 않고 오히려 영(the spirit)의 도움을 받았다.
이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9월성서가 독일어로 된 첫 번째 성서는 아니었고, 그 전에도 14개 독일어판 성서가 있었지만 루어의 번역은 헬라어 원문에 기초하였고, 백성들이 이해할 수 있는 독일어 문체를 사용하였다.
루터의 성서 번역작업은 성서를 소수 교회지도층이 독점하고 있던 독점권을 허무는 것이며 교황과 사제들의 손으로부터 성서를 빼앗아 평신도들의 손에 넘겨주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을 평신도들에게 전달하여 그들이 그것으로부터 모든 믿는 자들의 사제직을 끌어내고 깨닫도록 하였다.
3. 비텐베르크의 사회적 불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