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서양 중세의 봉건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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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문과학 서양 중세의 봉건제도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목 차
1. 서론 1
2. 봉건제의 기원에 대해-양도논법에 의한 도식적 사고를 경계하며 1
(1) 물질적 배경-봉급제가 불가능했던 환경 2
(2) 정신적 배경-혈족과의 유대관계를 대체 3
(3) 프랑크 왕국의 정책적 이용 3
3. 봉건제 5
(1) 주종제 5
ⅰ. 가신제의 성립과 전개과정 5
ⅱ. 봉토 7
(2) 장원제 9
ⅰ. 고전장원의 형태와 특성 9
ⅱ. 영주권과 공동체적 권리 10
ⅲ. 장원제의 변화 11
4. 봉건제 하에서의 계급의 분화와 사회구성 11
(1) 귀족 12
ⅰ. 귀족계급의 형성 12
ⅱ. 배타적 계급 이데올로기와 신분적 고착 14
(2) 성직자 15
ⅰ. 법적 신분으로서의 내부위계 15
ⅱ. 성직자의 세속화와 지배계급화 15
(3) 농민 16
ⅰ. 속민, 노예, 그리고 자유민 16
ⅱ. 농노(또는 일반적인 농민의 처지) 17
5. 결론 18
참고문헌 22

1. 봉건제 용어의 사용에 대해
2. 동양사회에의 적용문제-아시아적 생산양식론과 봉건사회론
1. 서론
봉건제의 개념 정의는 그것을 유럽사의 특정 시기에 나타난 사회구조에만 한정시켜 적용하는 입장과 세계 여러 지역에 나타난 전 자본주의 사회구조에 보편적으로 적용하려는 입장 중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첫 번째 입장에 의하면 봉건제도는 서유럽에서 게르만족의 이동이 완료된 이후, 로마와 게르만 사회의 일부 제도 혹은 집단적 전통이 결합하여 카롤링 왕조 말기인 9세기 말~10세기 초에 형성된 것이라 정의할 수 있으며, 두 번째 입장은 그와 달리 봉건제를 서유럽 중세사회에서만 발견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고 토지를 주요 생산수단으로 삼는 다른 대부분의 전통 사회에서 두루 발견되는 잉여수취에 있어서의 하나의 특정한 방식, 곧 자본주의 전 단계로서의 보편적 사회형태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역사를 연속적 진화의 과정으로 보고 모든 종류의 역사가 보편적인 발달단계를 거친다는 두 번째의 입장은 흔히 맑스주의 역사학의 입장으로 불리는 것으로, 역사의 시기구분이라는 참으로 모호한 문제에 있어서 오늘날까지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는 맑스가 서구 자본주의의 발생 및 발전과정을 과학적으로 해명하는 과정에서 서유럽의 역사를 모델로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 또는 사회구성체를 그 생산양식의 특성에 따라 고전고대적(Antike), 아시아적(Asiatische), 게르만적 사회구성체(Germanische Gesellschaftsformation)로 유형화한 것에 연원을 두고 있으며, 엥겔스에 의해 심화된 후 스탈린에서는 모든 민족과 국가에 적용될 사회구성체 5단계 발전론-원시공동체,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 사회주의-으로 정립되기까지에 이른다. 이러한 시각에는 심각한 가치판단의 문제가 수반되는데, 그것은 봉건제 사회가 근대자본주의의 필수적 선행단계로 인식됨에 따라 그러한 사회유형이 나타나지 않는 국가들을 정체되고 발전가능성이 배제된 형태로 파악하게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와 같은 입장을 취한다면, 서유럽을 제외한 나머지 역사, 특히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의 역사를 규명할 때 그것이 서유럽 봉건제의 단계를 내포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미분화되고 정체된 아시아적 생산양식 단계로서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는 지 둘 중 하나에 천착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입장이 가지고 있을 수 있는 문제점들- 현재 서유럽의 경제적 성취에 도취되어 자신들의 역사를 인류의 모델로 삼으려하는 유럽중심주의적 사고, 우리 역사를 규명함에 있어서 아시아적 생산양식 개념과 봉건제 생산양식 개념 양자 모두의 적용불가능성, 그리고 이러한 진보사관이 과연 실제적, 구체적 현실을 정확히 반영해낼 수 있는 지의-을 생각하면서, 중세 서유럽의 사회형태가 당시 특정지역에 한정해 나타날 수 있었던 지극히 특수하고 우연적인 현상이었음을, 곧 봉건제에 대한 첫 번째 입장을 지지하는 것에 이제부터 시작될 구체적 분석을 통해서 힘을 기울이려 한다.
2. 봉건제의 기원에 대해-양도논법에 의한 도식적 사고를 경계하며
흔히 서양 중세 봉건제의 기원을 민족이동 전의 로마인 또는 게르만부족의 기존 전통에서 찾거나, 그렇지않으면 그러한 시각에서 파생되는 가치판단의 문제 내지는 편견을 지양하기 위해 양자 모두의 전통에서 이후의 봉건제와 유사성이 보이는 여러가지 요소들을 보이면서 이들의 복합체인 것으로 설명하곤 한다. 이를테면 주종제도의 한 측면인 개인적 보호관계는 로마사회의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관계인 클리엔테이지(clientage), 그보다 더 유사한 것으로서 게르만 사회에서의 종사제(comnitatus)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는 것으로, 그에 수반하는 봉토분급의 제도-완전한 소유가 아니라 지대를 비롯 상위자에 대한 일정한 의무수행을 조건으로 용익권이 주어지는 불완전 소유를 특징으로 하는-는 로마사회의 프레카리움(precarium)과 민족이동 후 프랑크 왕국에서의 은대지제도(beneficium), 로마제정 후반기 예농의 모습을 보여주는 콜로누스(colonus) 등 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계통적 접근이 봉건제의 주요특징에 대한 파악, 이전 시대와의 연결을 용이하게 해주는 이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당시의 특수한 시대상황에 대한 깊은 고려를 비껴가면서 부분의 합이 곧 전체라는 피상적이고 도식적인 사고에 머물게 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가지게 한다. 마르크 블로크는 말한다:
…일반적으로 봉건적 제도에 관해 특정한 인종적 계보를 구한답시고 로마인가, 게르마니아의 숲인가라는 그 유명한 양도논법에 다시 한 번 갇혀버리는 잘못을 저지르지는 말아야겠다. 이같은 지적유희는 이 진화를 이루어내었던 힘에 대해 우리보다도 지식이 적었던 탓으로 블랭빌리에가 그리 믿었듯이 17세기의 귀족층은 거의 전부가 다 프랑크족 전사들의 후손이라고 믿는 것이 가능했던 시대의 산물, 또는 청년기의 기조가 그리 해석했듯이 프랑스혁명을 갈로-로마인들의 보복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능했던 그러한 시대의 산물로 접어두어야 할 것이다. 이는 마치 옛날의 생리학자들이 인간의 정액 속에는 완전히 형성된 소인간이 들어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봉건사회Ⅰ』, 마르크 블로크, 한정숙 옮김, 서울: 한길사, 1986, 243p
물론, 이전과 다른시대가 열리고 그 시대를 특징지을만한 새로운 제도가 창출되는 순간에 있어서도 결코 완전히 새로운 변화는 없다고 봐야할 것이다. 이후에 그 시대를 평가하는 우리들의 관점이 아니라 당시의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던 세대들의 관점에서, 어느날 갑자기 완전히 새로운 사회형태를 만들어보겠다는 욕구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블로크도 인정했듯이, 각자는 본능적으로 현존하는 사회조직이 제공하는 수단을 최대한 이용하려고 애썼을 것이며, 별로 의식하지도 않은 채 마침내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옛것을 적응시키려 노력하는 과정 중에 탄생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발달형태와 민족적 특색을 가진 두 문명이 충돌한 이후, 그리고 그로 인한 오랜 기간의 혼란 속에서 나타난 사회제도는 ‘유례없이 잡다한 요소들이 뒤섞인 것’ 이었다고 그는 설명한다. 사람은 자기 아버지를 닮기보다는 자기의 시대를 닮는다는 아랍의 속담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과거의 흔적들에 대한 도식화로는 결코 완전히 설명될 수 없는, 그 당시만의 독특한 여러 여건들의 소산이었던 사회체제로서의 봉건제를 이해하기 위해 여기서는 만족 침입에서 벗어난 당시 서유럽 사회에서의 봉건제 형성을 위한 구체적 배경을 물질적, 정신적으로 나누고, 프랑크 왕국에서의 정책적인 봉건제 활용에 대해서도 살펴보기로 한다.
물질적 배경-봉급제가 불가능했던 환경
장기간에 걸친 민족 대이동 후 서유럽의 많은 지역들이 황폐화되었다. 지역적 편차가 있으나, 약탈, 유기 등으로 정규적 생활의 흐름이 단절되었던 까닭에 수많은 도시들이 폐허에서 복구된 후에도 오랫동안 취약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농촌은 종종 처참하게 유린당하여 툴롱 지방의 예와 같이 토지를 다시 개간해야만 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교역활동은 극도로 안전치 못한 것이 되었다. 교통과 통신시설의 미비는 교환과 화폐유통의 어려움을 불러왔으며, 그것은 다시 봉급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감소라는 중요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물론 봉건적 서유럽을 폐쇄경제라 정의할만큼 그 사회에서 교역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화폐의 주조 및 사용이 있었으며 상업은 내륙에서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교환과 화폐의 유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은 중요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데, 그것은 곧 봉급의 사회적 역할의 감소이다. 사회적 계약의 형태로서 봉급제가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고용자측에서는 통화량이 언제나 풍부하여 어떤 경우에도 공급원이 바닥날 위험성이 없어야 하고, 봉급생활자 측에서는 이렇게 해서 받은 화폐가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사들이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확실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11세기 이전, 곧 봉건시대 1기까지의 서유럽사회에서는 이러한 상황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국왕이 고위 관리의 봉사를 확보하고자 하는 경우이건, 또는 시골귀족이 무장종자나 농장노동자를 고용하여 일을 시키려는 경우이건 간에 사람들은 일정액의 화폐를 정기적으로 지불하는 방식이 아닌 다른 보수체계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는 두 가지 해결책이 있었다. 먼저 피고용자를 고용자의 집에 유숙시키면서 그에게 식사와 의복을 제공하는 이른바 솔거부양, 다른 하나는 수고의 대가로써 토지를 봉사자에게 양도하고, 이를 직접 경영하거나 또는 토지 경작자들로부터 공조를 징수하는 형태로 봉사자 자신의 생계를 스스로 유지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교통, 통신이 불편하고 교역이 빈약하여 수많은 식솔을 윤택하게 부양하는 것이 곤란했던 시대에는 대체로 솔거부양제가 토지급여에 기초한 보수체계만큼 널리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봉토의 분급을 주요한 제도적 특징으로 가지게 된 봉건사회는, 고용자와 피부양자의 인적 유대에 있어 초반에 고려되었던 솔거부양보다는 긴밀성이 적고 이후 주종결합이 해이해지는 시기나 봉급제 사회보다는 큰, 중간적 사회특징을 가졌으며, 그 원인은 봉급제의 성립을 불가능하게 만든 당시의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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