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어학 야나기 무네요시와 민중 국가 그리고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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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야나기 무네요시와 ‘민중’, ‘국가’, 그리고 ‘종교’
‘민예’라는 말만큼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를 잘 드러내 주는 말도 달리 없을 것이다. 야나기에 대해 비판적이든 그렇지 않든 모두가 마치 야나기=민예라는 공식이라도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소 의외인 것은 야나기 연구에서 민예는 수도 없이 언급되지만 정작 그것의 대상인 ‘민’에 대한 관심은 지나치게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물론 야나기 연구자들이 반드시 ‘민’이라는 역사학적인 개념을 먼저 연구해야만 한다는 그런 식의 학문적 의무감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야나기의 ‘민’에 대한 관점과 사색이 그의 ‘국가’와 ‘종교’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술관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민중’ 혹은 ‘대중’으로 불리는 집단이 이론적으로 연구대상이 된 것은 일본의 경우 20세기 초반인데, ‘민중’이라는 개념어는 야나기의 민예론을 설명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20~30년대 일본문화사를 이해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키워드이다. 그러나 야나기의 민예론을 연구하는 기존의 연구에는 여기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나기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인 이데카와 나오키의 경우에도 민예론을 야나기의 검토하면서 민중에 대한 논의를 펼치고는 있으나 이론적인 접근이라기 보다는 공예가의 입장에서 야나기의 주장을 직접적으로 반박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 이데카와 나오키, (정희균 역, 학고재, 2002)참조할 것. 최근에 와서는 여기에 대한 관심이 점차 늘고 있다. 나카미 마리는 민중의 개념을 역사적으로 분석하면서 야나기의 민예운동의 성격을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나카미 마리, (2003, 국역본 2005 효형출판) 참고할 것. 1910년대 이후 ‘대중’이 ‘평민’을 누르고 점차 보편성을 얻어가는 과정을 문화사적으로 체계적인 분석을 시도한 논문은 다음을 참고할 것. 島村 輝, ‘群衆, 民衆, 大衆’ (近代日本の文化史 5, 岩波書店, 2002)
흥미로운 것은 이 시기에 ‘근대’라고 하는 인식이 본격적으로 논의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민중’은 근대와 더불어 도착한 새로운 개념어인 셈이고 개념어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개념적 신체에 걸맞는 내포된 영혼을 필요로 하는 법이다. 이때 민중이란 개념을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근대의 동학으로 다시 탄생한 ‘일본’이라는 국가 단위체였을 것이다.
이러한 설명이 다소 도식적이긴 하지만 이것이 분명히 알려주는 어떤 지표마저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야나기 연구는 최근까지도 야나기를 마치 ‘진공상태’를 살았던 사람인 것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야나기는 이러한 일본=근대=국가라는 20세기 초반을 온전히 살았으며 그 자신 많은 글과 강연을 통해서 현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발언하고 사색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을 우리가 여기서 상기해야만 하는 것은 야나기의 이른바 ‘양의성’이라고 할만한 지점들이 이러한 것을 분명히 하게 되면 상당부분 해명될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그렇다.
야나기는 ‘양의적’ 가라타니 고진의 야나기에 대한 ‘양의성’을 필자는 이렇게 해석했다. 가라타니 고진, ‘미와 지배’, 9호, 1997년 9월호. p.190 참고. 이 글의 일본어 원문은 柄谷行人, ‘美學の效用’, No.14
이라고 할만큼 일견 모순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엘리트로서의 삶과 민중에 대한 관심의 동거, 조선예술에 대한 애정과 식민정책에 대한 인정, 서구에의 탐닉과 일본(민족)에 대한 지나친 애정 등 그의 삶은 그 자체로 모순과 이해불가라는 삶의 비밀을 그대로 간직하기라도 한 듯이 우리에게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대체로 이러한 모순을 모순으로 인식하기 보다는 어느 한쪽의 길만을 따라서 논리적인 결론을 이끌어 내는데에만 집중해온 느낌이다. 이 경우 나머지 다른 길은 의도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삭제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물론 이 짧은 글이 야나기의 이러한 삭제된 모순의 다른 길 전부를 복원하겠다는 의도는 없다. 다만, 필자의 소견은 그러한 기억의 복원의 실마리로서 민중과 그것의 외연으로서의 국가 그리고 민족단위체에서 형성되고 지지된 예술과 종교에 대해서 생각해 봄으로써 야나기 무네요시의 전전의 행보와 전후의 인식의 연결고리를 찾아보고자 하는데에 있다.
민예운동은 야나기의 가장 핵심적인 활동 중의 하나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인데, 우리는 민예운동에 대한 공예사적인 관심 보다는 ‘민예’라는 말의 출발점이 된 ‘민중’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이하 민예와 민중에 대한 관계, 길드 조직에 대한 논의는 앞의 나카미 마리의 연구서를 정리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로 인용 페이지를 밝히지 않았다.
. 당대(1920년대)에 막 떠오르기 시작한 ‘민중’이라는 개념과 이러한 민중을 둘러싼 다양한 논의들, 이 흐름에 대한 야나기의 반응 등을 살펴봄으로써 야나기의 민예론을 당대의 ‘민중’에 대한 논의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다시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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