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민족교육문제를 둘러싼 재일코리안 단체와 일본사회의 연대 해방직후와 오늘날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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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문과학 민족교육문제를 둘러싼 재일코리안 단체와 일본사회의 연대 해방직후와 오늘날의 비교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민족교육문제를 둘러싼 재일코리안 단체와 일본사회의 연대 : 해방직후와 오늘날의 비교
Ⅰ. 들어가며
재일코리안 사회는 조국의 해방과 더불어 스스로의 교육기관을 만들어 우리말과 역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전후 60년에 걸쳐 세대가 변화해 오는 가운데 여전히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민족교육의 근간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재일코리안 개개인이 일본 사회의 구조적 차별과 억압 가운데서 민족교육의 목표를 단기적인 생활의 윤택함이나 출세에 두기보다는 장기적으로 후세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고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시키려는데 두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재일코리안이 민족학교를 설립하고 유지하는데 주력한 이유는 일본인으로 동화되어가는 예속적인 경우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개별적으로 각각 한민족으로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후세 자녀들을 한민족으로 교육시키는 일 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역사적 경험을 통해 자각했기 때문이다 小澤有作. 『在日朝鮮人敎育論: 歷史編』(東京: 亞紀書房, 1973), pp. 202-205.
. 다시 말하면 재일코리안들은 역사적 현실적 상황에 비추어 민족교육을 경제적 욕구 충족으로 위한 생활의 문제로서 보다는 철학적 기반을 둔 존재의 문제로 삼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곤란한 현실 여건 가운데에도 민족교육기관이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만 이러한 학부모들의 순수한 개인적인 동기만으로 민족교육기관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아니며 여기에는 현실적인 지원과 투자가 필요했다. 민족교육이 제도적으로 원만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일본 교육당국으로부터의 관심과 배려가 필수적이지만, 어느 시기에는 이 조건은 충족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억압과 무관심으로 민족교육을 위협하는 일이 많았다. 정책적으로 사회적으로 민족차별이 존재하는 가운데 재일코리안 학부모들이 그런 대로 민족교육에 대한 욕구를 충족할 수 있었던 것은 민족단체가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조직을 들어 교육사업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특히 40년대의 조련(재일본조선인연맹)과 50년대 이후의 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 민족교육의 유지를 위해 쏟은 열정은, 비록 그 정치적 이념에 한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현실적 의미는 아무리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여기에 민족교육에 대한 일본 정부의 탄압이 있을 때, 그 부당함을 일본 사회에 고발하고 재일코리안들의 민족교육 수호 운동을 지원한 소수의 일본인이 있었던 것도, 오늘날까지 민족교육기관이 유지되고 있는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이들 일본인과 관련 단체는 재일코리안의 민족교육 문제를 타민족의 문제만으로 보기 보다는, 일본 사회의 민주화 문제 가운데 하나로 보았으며, 민족교육에 대한 탄압을 민주화에 대한 탄압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재일코리안과의 연대에 가담하게 된 것이다. 일본 사회에서 다양한 한일 민족간의 연대가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재일코리안의 민족교육을 둘러싼 연대는 일본 사회의 민주화 변화 양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움직임이 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발표는 조련과 조총련의 조직적인 관여와 지원을 중심으로 재일코리안 민족교육의 거시적인 흐름을 정리하는 한편, 제도적 억압에 맞선 재일코리안 민족교육 수호 운동에 대한 일본인 지원의 성격을 살펴보고자 한다. 민족교육 문제로서는 1940년대의 한신(阪神) 교육투쟁과 오늘날의 에다가와(枝川) 조선학교 법정투쟁을 사례로 하여, 각각의 사건에 관한 개요를 서술하고 일본인과의 연대 지원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1940년대와 오늘날에 있어서 민족교육 문제를 둘러싼 재일코리안과 일본인들의 연대 양상을 비교 검토하고자 한다.
Ⅱ. 해방직후 민족교육문제를 둘러싼 재일코리안 단체와 일본사회의 연대
1. 조련의 민족교육 주도와 민족교육문제의 대두
식민통치 기간 중에 일제에 의해 동화정책을 강요당하여 재일코리안 아동과 젊은이들은 우리말과 글을 모르는 가운데서 일본의 패전과 조국의 해방을 맞게 되었다. 해방과 함께 재일코리안들이 가장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고국에 하루빨리 귀환하는 문제와 동포 자제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따라서 일본 각지에서 수많은 국어강습소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교육기관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1945년 말에 일본 안에 국어강습소가 200개 이상, 수강인원이 2만명 이상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魚塘. 「解放後初期の在日朝鮮人組織と朝連の科書編纂事業」『在日朝鮮人史究』28 (1998. 12). p. 108.
. 소수 독립적인 학교건물을 세운 곳도 있었지만 대체로 일본인들이 운영해 오던 기존의 교육시설 일부를 빌려서 사용하는 형태로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 우리말 교육을 실시했다. 민족교육의 체계가 정비될 수 있었던 것은 재일코리안의 중추적인 민족단체로서 조련이 결성되고 일찍이 1945년 9월 4일에 도쿄에서 조련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어 전국적으로 민족단체들을 규합하여 10월 15일에 결성대회를 갖고 조직을 정비해 갔다. 최영호. 『재일한국인과 조국광복』(서울: 글모인. 1995), pp. 151-181.
, 조련이 조직적으로 교육사업에 적극 관여하면서부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