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구 보고서] 신명여고 - 일제 시대의 기독교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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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 보고서] 신명여고 - 일제 시대의 기독교 교육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일제 시대의 기독교교육 (신명여고 편)
1. 설립 당시 시대적 배경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한반도에는 어둠이 가득 덮여 있었다. 이 땅에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일어났고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게 우리나라는 외교권을 강탈당했다. 이것의 부당성을 알리고 우리의 외교권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던 고종 황제는 신명이 설립된 해인 1907년 7월 24일에는 한일신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일제에 의해 폐위를 당하고 순종 황제로 양위되었다. 이어 그해 8월 1일에는 우리의 군대마저도 해산당해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일제의 식민지화 되었다. 우리에게는 암흑의 시기였다.
이러한 소식이 전국에 전해지자 우국지사들은 교육으로 국민의 정신을 무장시켜 문명을 얻으면 독립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촌촌 곳곳마다 학교를 세우기 시작했다. 이러한 계몽운동은 이해에 미국에서 돌아온 안창소 선생이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우고 젊은 자녀들을 교육시켜야 된다고 외쳤기 때문에 더욱 촉진되었다. 이라하여 1907년 8월 1일 이전에는 50여개 밖에 없었던 사립학교가 1907년부터 1910년 사이에는 전국에 인가된 2,250개나 되었다.
2. 신명여고 설립
신명학교는 1907년 선교사로 이 땅에 온 1907년 10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 소속 선교사의 부인이었던 마샤 스코트 브루엔(한국명 부마태) 여사가 세운 영남 지역 최초의 여학교이다. 신명은 일제치하에서 고통 받던 우리 민족에게 복음의 씨를 뿌려 삶의 희망을 갖게 하였다. 또한 교육에 목말라 있던 여성들에게 학문의 산실로서 그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였다.
여성교육의 요람인 이학교의 개학식 때 브루엔 여사는 12명의 학생 앞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라는 훈화를 했다. 장소는 남산(현재의 동산동)에 있던 선교사 사택 중 부인용 사랑채였다고 한다. 100년 전 신명여학교의 첫 입학식 모습이다. 당시 학교 설립 인가일은 15일, 개교일은 23일이었다고 한다. 영남지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이었다.
사실 시작은 브루엔 여사가 아니었다. 그녀보다 5년 앞서 대구에 온 존슨 의사의 부인인 에디스 파커가 바느질 반으로 모집해 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존슨 부인은 가가호호 찾아 다니며 그 집의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딸과 손녀를 예배당에 보내주면 글을 가르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시대상은 남존여비의 사상이 강할 때라 여자들은 집에서 살림만 하면 되지 교육은 받아서 뭐하느냐는 분위기였다. 이것은 안 존슨 부인은 바느질을 가르쳐준다는 핑계로 소녀들을 예배당으로 모이게 했고 바느질 교실을 시작하게 되었다. 비록 바느질 반이었지만 글을 읽도록 한글을 가르쳤고 노래와 성경 요절도 가르쳤다.
이 무렵 브루엔 여사가 대구에 온 것이다. 존슨 부인은 선교 사업의 확장으로 더 바빠져 이 바느질 반을 브루엔 여사에게 인계하였고 이와 별개로 놀스 선교사가 가르치던 15세 미만의 소녀 14명을 브루엔 여사에게 인계하였다.
브루엔 여사는 존슨 부인과 놀스 선교사가 가르치던 내용을 그대로 가르치고 또 먼저 개교한 대남학교의 교육과정을 본받아 지리, 산술 등도 가르쳤는데, 이것이 신명소학교의 시작이 되었다.
그러나 브루엔 여사는 지금처럼의 가정학교 형태만으로는 교육사업의 의욕을 충족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같은 달에 대구 선교지부에 교사를 마련하여 신명여자소학교를 세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