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백범 김구 선생과 일제시대의 공무원의 삶에 관한 고찰

 1  인문과학 백범 김구 선생과 일제시대의 공무원의 삶에 관한 고찰-1
 2  인문과학 백범 김구 선생과 일제시대의 공무원의 삶에 관한 고찰-2
 3  인문과학 백범 김구 선생과 일제시대의 공무원의 삶에 관한 고찰-3
 4  인문과학 백범 김구 선생과 일제시대의 공무원의 삶에 관한 고찰-4
 5  인문과학 백범 김구 선생과 일제시대의 공무원의 삶에 관한 고찰-5
 6  인문과학 백범 김구 선생과 일제시대의 공무원의 삶에 관한 고찰-6
 7  인문과학 백범 김구 선생과 일제시대의 공무원의 삶에 관한 고찰-7
 8  인문과학 백범 김구 선생과 일제시대의 공무원의 삶에 관한 고찰-8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인문과학 백범 김구 선생과 일제시대의 공무원의 삶에 관한 고찰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백범 김구 선생과 일제시대의 공무원의 삶에 관한 고찰
1) 백범 김구
백범 김구 선생님은 명실상부하신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해 한평생 애쓰시다가 안두희의 총탄에 숨을 거두신, 우리시대의 진정한 애국자이자 지도자셨다. 백범 은 한국인의 가슴속에 독립운동의 상징과 같은 존재로 자리 잡고 있다. 독립운동, 임시정부를 생각할 때 많은 사람들이 김구를 떠올리게 된다. 김구는 조선말, 대한제국, 일제 식민지시기, 미군정,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일평생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의 삶은 외세의 침략과 일제의 식민지 지배, 그리고 남북분단으로 이어지는 민족적 고통과 시련을 극복하려는 투쟁의 삶 그자체이다. 동학, 의병, 애국계몽운동, 105인 사건, 임시정부, 반탁운동, 남북협상 등 조선말에서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그의 투쟁의 흔적은 곳곳에 배여 있다.
선생님은 1876년 8월 29일 새벽 자시에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빈농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나셨다. 그의 아명은 창암이다. 17세되던 1892년에 조선의 마지막 과거시험인 임진경과에 응시하고자 해주로 갔으나, 매관매직을 일삼은 당시의 부패한 광경을 보고 실망하여 다시 귀향하여 풍수와 관상 공부에 몰두하셨다고 한다. 이듬해 18세에 동학교도 오응선의 종지를 듣고 동학에 입도하고, 이름을 창수로 고쳤다. 이듬해 19세되던 해에 팔봉도소 접주가 되어 해주 죽산장에서 선봉장으로 7백 명의 총군을 거느리고 기병하여 해주성을 습격하였으나 실패한다. 참고로 이해는 1894년으로 동학농민운동이 있었던 해이기도 했다. 이듬해에, 진사 안태훈의 집에서 그의 아들 안중근과 첫만남을 갖게 된다. 1896년 21세되던 해에 귀국길에 올라 황해도 안악으로 내려오는 도중 2월 하순에 치하포 객주집에서 변복하고 있는 일본군 육군 중위 쓰지다를 살해하고,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를 죽였노라. 해주 백운방 텃골 김창수”라고 쓴 포고문을 길가의 벽에 붙이고 집으로 돌아간다. 3개월 뒤에 체포되어 해주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는다. 7월 27일에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그로부터 한달 뒤인 8월 26일에 “김창수는 강도가 아니라 국모의 원수를 갚은 사람이므로 특사한다”는 고종 황제의 특사령이 내렸으나, 일본 공사 하야시의 압력으로 출옥하지 못한다. 이때 이미 조선은 일본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인 1898년 23살 때, 3월9일 밤에 탈옥을 하여 전국을 방랑하다가 공주 마곡사에서 승려가 된다. 1905년에 을사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서울 상동교회에서 열린 전국대회에 참예하고, 이준, 이동녕 등과 만나 을사 5조약의 철회를 상소하고 구국 운동에 참여하였는데, 이때 그의 나이 이립, 30이었다. 1908년엔 안창호 등 애국지사 104명과 “신민회”를 조직한다. 이듬해, 해서 교육총회를 조직하고 학무총감을 맡는다. 도내를 순회하며 신교육 운동과 애국 사상을 고취하고 배일운동을 하다가,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두에서 이토를 사살한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자 이사건의 배후로 몰려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불기소로 방면된다. 1911년에 안명근사건, 일명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으로 1월 5일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다. 일곱차례의 혹독한 고문을 받고 징역 17년 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 36세였다. 1913년에 한일합방으로 일제의 국적에서 이탈하려는 의도로 옥중에서 이름의 구(龜)자를 구(九)자로 바꾸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미천하고 무식한 사람들도 모두 자신과 같이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뜻에서 백정의 백과 범부의 범자를 따서 호를 백범이라 하였다. 1914년에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서대문감옥 왜인과장과 싸워 인천감옥에 이감되어 매일 허리에 쇠고랑을 차고 축항 공사장으로 끌려다니며 중노역을 하게 된다. 이해 7월에 가출옥으로 석방되어 동산평 농장으로 가서 농감의 직책을 맡고 농민들을 지도 계몽한다. 1919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동지 15명과 함께 ‘이륭양행’을 타고 상해로 건너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에 취임하게 된다. 이때 그의 나이 44세였다. 1927년 11월에 국무령에 취임하여 헌법을 개정, 위원제로 하는 임시정부 내각을 조직한다. 이듬해엔 민족진영의 단결을 도모하여 이동녕, 이시영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자서전 “백범일지” 상권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그의 나이 53세 였다. 또, 1931년엔 특수 비밀 결사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독립투사를 양성하였다. 이듬해 1월8일에 도쿄에 이봉창 의사를 보내 일황에게 수류탄을 던지게 하였으나 명중하지 않아 실패한다. 이어서 윤봉길 의사에게 폭탄을 주고 4월 29일에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린 천장절 경축식장에 투폭하여 시라카와 대장을 즉사케 하는 등 10여 명을 살상케 했다. 1933년 5월에 남경에서 장개석 총통과 만나 하남성 낙양 군관학교 분교를 한국 군관 양성소로 쓰기로 합의한 뒤 대일 전투방책을 협의한다. 윤봉길 의사 의거 후 신변의 위험이 커져 가흥으로 피신하였다. 1936년엔 이동녕, 이시영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였는데 이때 그의 나이 61세 환갑이었다. 1937년 7월 7일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일제의 폭격이 심해지자, 임시정부를 강소성 진강으로 옮겼다가 다시 장사로 옮기게 된다. 1938년엔 그해 5월에 남목청에서 열린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의 3당 통합회의 석상에서 공산당 계열의 조선혁명당 당원 이운한의 총격을 당해 유동열, 현익철과 함께 중상을 입고 입원 치료를 받게 된다. 1939년엔 중일전쟁이 점점 더 치열해지자 1백여명의 동포를 이끌고 임시정부를 광주로 옮겼다가 기강을 거쳐 다시 중경으로 옮긴다. 이해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된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어도 슬픔을 인식할 겨를이 없이 긴박했던 당시의 상황을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지금의 상황과는 너무도 다른 당시의 상황이 피부에 와 닿지는 않지만, 울분이 가슴속에 맺혔을 것이란 것만은 나로서도 충분히 짐작이 간다. 이듬해인 1940년 김구선생께서 65세 되시던 해에,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3당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발족시키고 집행위원장에 추대된다. 또한 임시정부 주석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이 해 중경의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이청천, 참모장에 이범석을 임명하였다. 1941년 일제가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다음 날인 12월 9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5개항의 대일 선전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1943년엔 임시정부와 중국정부사이에 광복군에 대한 정식협정을 체결하고 공포한다. 1944년 2월에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재선되었으며, 부주석에 김규식이 선출되었다. 미국 O.S.S.와 합작으로 국내 침투를 위한 특수 부대로 광복군 특공대를 편성하여 “국내진공작전”을 계획 하였다. 그가 70세 되던 1945년은 우리나라 광복의 해였다. 그러나 그의 맏아들인 인이 28세로 세상을 떠난해이기도 하였다. 맏아들을 잃은 슬픔속에서도 조국 광복을 위해 부단히 애쓰시던 선생의 모습이 떠올라 잠시 숙연해 진다. 그 해 8월 15일 저녁에 성서성에서 조국 해방의 소식을 듣고, 11월 5일에 중경을 떠나 상해로 와서 11월 23일에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미군 수송기편으로 상해를 떠나 27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 이 해 12월 27일에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우리나라에 대해 5년 간의 신탁통치를 결정하자, 즉각 거족적인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1946년 2월 1일에 비상국민회의를 조직하고 2월 14일에 민주 의원을 개원한 후 총리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의사의 유골을 효창공원에 봉안하였다. 1947년 선생님 72세 되시던 해 1월에, 비상국민회의가 국민회의로 개편되자 부주석에 취임하게 된다. 11월에 UN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에 의한 정부 수립 결의안을 지지한다. 그리고 선생의 정치이념을 표현한 ‘나의소원’을 발표한다. 1948년 3월에 UN총회에서 결의된 ‘가능한 지역에만 국한한 선거 실시’ 결정에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조국의 영구 분단을 막고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김규식 박사와 함께 4월 19일에 평양으로 가서 남북 정당 사회단체 협의회에 참석하여 완전 자주 통일을 위한 남북 협상을 마친 뒤, 조국 통일에 관한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고 5월 5일에 서울로 돌아온다. 이것을 두고 북한 김일성에 의해 두 노인이 조종, 이용당했다는 항간의 여론이 대다수 였는데, 선생의 조국통일, 자주독립을 위한 노력만은 퇴색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런 선생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8월 15일에 이승만을 수반으로 하는 남한만의 단독 정부가 수립되자 백의 야인으로서의 고전을 읽고 붓글씨를 쓰며 울적함을 달랜다. 이듬해 1949년 6월 26일 낮 12시 36분에,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의 저격을 받고 운명하시니 이때 선생의 나이 향년 74세셨다. 7월 5일에 전 국민이 애도하는 가운데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된다. 그리고 그후,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추서된다.
이상으로 간략하게나마 선생의 일생을 전반에 걸쳐 살펴보았다. 선생의 삶은 일제식민지의 고통과 탄압으로부터 시작되어 대한민국의 건국이라는 우리민족의 해방의 역사와도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70평생을 올곧이 바치셨다고 봄이 맞는 것 같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아내가 죽었을 때도, 아들과 딸이 죽었을 때도, 선생은 피붙이들의 죽음으로 슬퍼할 겨를이 없이, 잠시 감상과 우수에 젖을 시간도 없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 속에서 대한민국의 앞날에 대한 구상과 걱정으로 전전긍긍, 노심초사 하셨던 것 같다. 실로 이 대목에선 평화로운 이 시대에 자유롭게, 조금은 나태하게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나로서는 절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으며, 부끄러움에 고개가 절로 숙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김구는 조선의 자주독립을 줄기차게 주장했었는데, 그가 원한 진정한 자주독립이란 무엇인가? 이 부분은 이승만과 대비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승만은 미군정의 힘을 빌어서라도, 또한 북한과의 통일된 하나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