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어학 파블로프의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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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문어학 파블로프의 업적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Ivan Petrovitch Pavlov (1849-1936)
파블로프의 영향은 현대 심리학의 여러 분야에서 예리하게 느낄 수 있다. 관련된 학문 분야에서 그의 연구들은 주관적인 개념에 대한 전통적인 적용으로부터 충분히 객관적이고 정량화 할 수 있는 침의 분비나 근육의 움직임 같은 분야로의 이동으로, 연상 심리학의 발생을 도왔다. 결과적으로 파블로프의 연구들은 John B. Watson에게 행동을 조사하는 새로운 방법과 그것을 조정하고 수정하는 도구들을 제공하였다.
1 신학생, 과학을 선택하다.
파블로프의 집안은 6대째, 러시아 정방교회에서 봉사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 페트르 드미트리예비치 파블로프와 그의 두 삼촌(둘 다 이름이 이반이다.) 모두 신학교를 졸업하고 지방 교구 교회의 사제로 들어갔다. 특히 파블로프의 아버지 페트르는 운이 좋아서 라쟌에 있는 교회에 사제로 들어갔다. 그의 아버지는 신앙심이 매우 깊었고, 자신이 관할하는 교구민을 위해서 때로는 교회의 규칙을 따르지 않았던 성직자로 알려져 있다. 파블로프의 어머니인 바바라 이바노브나 파블로바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지만 성직자의 딸이었다는 것과 11명의 자식을 낳았다는 사실과 페트르가 그녀를 극단적인 신경쇠약자라고 했다는 점이 전부이다.
파블로프는 1849년 9월 26일 랴잔에서 태어났다. 그는 체구가 작고, 체질도 약하고, 야위었다. 그리고 열정적이었으며 감정이 격해지기 쉬운 성격이었다. 아버지 페트르는 그의 열정적인 성격이 엄마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적인 영향이라고 나무라곤 했다. 어려서 그는 책읽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아버지의 서재를 등한시 했고 대신 아버지를 도와 정원을 돌보거나 과일을 따서 모으는 일을 더 좋아했다. 그의 가족은 안락한 2층 목재 집에서 살았다. 그들은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가정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파블로프가 8살 때. 높은 울타리에서 이웃집 안마당에 있는 돌로 된 연단 위로 떨어져 심한 중상을 입었다. 그리고 수개월이 지나도 잘 회복도지 않았다. 결국 근처 남자수도원의 원장이었던 그의 대부가 파블로프를 데려가 몸과 마음을 치료하기로 했다. 치료란 계속되는 훈련, 훈련, 또 훈련이었다.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놀고, 밤에는 몇 권의 책들만 있는 방안에서 잠을 잤다. 그는 지루함을 이기기 위해 그 책들을 대충 훑어보기 시작했고, 독후감을 써서 수도원장에게 보내기도 했다. 가족들에 의하면 파블로프는 아주 달라져서 학구파가 되었고, 교육을 잘 받은 소년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파블로프는 집에서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비로소 11살 때에 랴잔신학교에 입학하여 사제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교과과정 중에서 음악을 제외한 교회의 역사와 교리 러시아어, 세계사, 문학, 언어학, 논리학, 철학, 자연고학의 몇몇 과목 등을 망라하는 엄격한 교과 과정에서 최상위에 해당하는 등급을 받는 우수한 학생이 되었다. 아버지는 장남인 파블로프가 가문의 7번째 세대 중에서 제일먼저 성직자가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있었다. 러시아 절대 독재정치와 엄격한 계급 구조로 된 거대하지만 절망적이고 가난한 나라였다. 인구의 대부분 농노로 대개는 너무 가난했고, 법적으로 지주의 넓은 토지에서 일하도록 매여 있었다. 농노는 이사할 권리 뿐 아니라 권리라는 자체가 전혀 없었다. 러시아의 1825년부터 1855년까지의 차르(황제)는 철의 주먹을 가진 니콜라스 1세로 그의 슬로건은 ‘독재정치. 정교신앙, 민족성’ 즉, 절대적인 차르의 통치, 정신적인 교회의 절대 권위, 국가의 운명과 러시아 국민들의 전통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이다. 그는 서구적인 사고방식은 문제만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1855년 니콜라스 1세가 죽고 난 뒤 계승자인 알렉산더 2세는 생각이 달랐다. 크림전쟁(1855~1856)에서 당한 치욕적인 대패에 깜짝 놀라 현대화가 되어야만 나라가 강해지고 번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차르에 의해 1861년 농노들이 해방되었고(미국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 시킨 지 2년 후)러시아의 법조계, 교육계, 서방으로의 여행 규제 완화, 국민들의 집회나 대중연설에서 더 자유를 주었다. 물론 차르의 공관들이 보기에 위험하다고 생각하면 체포당하기는 했지만 국민들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었다. 검열도 완화되어 전에는 금지했던 대중 토론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많은 책들이 출판되었다.
러시아에는 합법적인 정당이 없는 대신 대중잡지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 잡지에 매우 다양한견해가 실렸다. 급진 잡지는 러시아가 서양과 마찬가지로 차르가 없어져야 한다고 암시적으로 말했고, 보수적인 잡지는 어시아의 전통을 지키려면 위험한 생각들을 짓밟아야 하기 때문에 차르는 더욱 엄격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잡지들은 최신 소설부터 미국의 남북 전쟁에 대한 뉴스, 또 최신의 과학적 발견에 대한 보고까지 모든 것을 읽을 수 있는 중요한 장이었다. 보수주의자들은 『러시아 헤럴드』를 읽었고 급진주의자들은 『동시대』 또는『러시아 논쟁』이라는 잡지를 읽으며 논쟁거리에 대한 다른 사람의 생각들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고도의 변화는 젊은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예전처럼 부모의 발자취를 따라 가업을 잇지 않았고, 가족의 전통을 거부하고 상당히 매력적인 과학 쪽으로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