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어학 개성상인의 자본축적 과정과 쇠퇴요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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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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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개성상인의 자본축적 과정과 쇠퇴요인은?
1. 머 리 말 2. 조선초기 개성상인의 성장
3. 개성상인의 자본축적 活性化 4. 조선후기 개성상인의 쇠퇴요인
5. 식민지시대와 그 이후의 개성상인 6. 맺 음 말
1. 머 리 말
개성상인은 양 시대인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활발히 활동한 商人集團이다. 그들은 양 시대에 각기 두르러지게 번성하고 발전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래서 개성 상업과 개성상인의 활동상을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까지 알아보고, 개성 상업의 萎縮과 復舊의 사정, 개성상인의 발전 기반을 생각해보고 알아보자는 것이다.
개성상인은 고려시대 이후 줄곧 이 땅에서 상업 유통업계를 장악한 상단이다. 고려시대에는 개성이 정치˙경제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상권을 장악하는데 유리하였다. 개성상인들은 사신의 왕래에 의하여 발생하는 정부 무역(公貿易)과 외국상인들에 의한 민간 무역(私貿易)을 하였다. 개성 근처 예성강하구의 벽란도는 국제무역항으로 구실을 하였다. 그래서 고려의 수도인 개성은 商業都市로 발전하였다. 반면에, 조선시대에는 이씨 정권에 반대하는 개성상인은 정치에는 관심을 두지 아니하고 오로지 상업에만 열중하였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개성상인은 전국 각지에 松房을 설치하여 주단과 포목 등을 판매하였는데 송방은 보부상의 據點이 되었다. 당시 약 1만명으로 추정되는 개성상인이 전국적으로 분산되어 行商을 하였으며, 송방은 정보교환과 상품공급 장소 및 보관소로 이용되었다.
개성상인은 고려시대에는 꾸준히 성장하였지만, 조선 전기에는 鎖國主義政策 때문에 민간상인들은 外國貿易을 일체 금지하게 되었다. 또 억상 정책으로 국내 상업도 위축되었다. 그러나 개성상인은 외국무역활동은 금지되었지만, 국내 상업에 있어서는 계속적으로 활동하였다. 정치적으로 개성사람들의 進出이 배제되어서 상업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商人郡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개성상인은 서양보다도 200년이나 앞서서 사개송도치부법이라는 독특한 복식부기를 고안하여 사용하였다. 이것은 서양의 복식부기와 근본 원리가 같다. 사개는 주는자, 받는자, 주는 것, 받는 것의 네 가지 거래요소이다. 개성상인들은 독특한 複式簿記를 고안하여 사용하였다. 개성상인들은 송나라나 아라비아 무역상들과 거래하면서 貨幣流通과 산술법에 따라 고유의 개성부기를 만들어 썼다. 사개송도치부법이란 명칭 중에 송도는 개성의 지명이며 치부법이란 기장방법(記帳方法)을 말하는 것으로 후세인(後世人)이 송도에서 전래한 기장방법이라 하여 송도치부법이라 이름을 정한 것은 누구나 추측할 수 있는 바이지만 사개(四介)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에 관하여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현병주 선생의 전게서(前揭書)에 의하면 봉차(棒次)가 일개(一介), 급차(給次)가 일개(一介), 이익(利益)이 일개(一介), 손해(損害)가 일개(一介), 합(合) 사개(四介)라 자칭(自稱)하였다. 현병주편(玄丙周編) = 사개송도치부법(四介松都治簿法)(全) 1916 p.15
사개송도치부법은 개성상인의 독특한 기록방식을 바탕으로 상업의 합리적 경영과 상술을 개발하여 나가는데 큰 힘이 되었고, 다른 하나는 차인제(差人制)를 실시하였는데, 이것은 개성의 상공업노동자간에 보편적으로 행하여졌던 일종의 수습제도로서 부유한 가문의 자식들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다른 상가(商家)에서 수년간 수습을 거친 뒤에 가업을 이어받는 제도이다. 참고
이것은 개성상인들만의 독특한 상인의식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렇게 개성상인은 고려시대에는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었는데, 조선 전기에는 태종의 억상정책으로 국내의 민간상인들의 해외무역을 금지 시켜 큰 타격을 입었으나 인삼 무역과 홍삼의 밀무역 그리고 송방의 활용으로 국내 상업에 있어서는 계속적으로 성행하였다. 그러나 개항이후 개성상인은 하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개성상인의 자본은 개항 전에는 국내 최대의 토착 민간 자본으로 성장하였으며, 개항 이후에는 외국자본의 침입에 대항하는 가장 강한 민간 자본으로 대두하였다. 그러한 다른 상인집단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고 있는 상황에 개성상인은 외국자본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개성상인의 자본은 외국자본에 의하여 철저히 봉쇄당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인산의 수출권을 일본인에게 빼앗겨 그 붕괴속도가 더욱 가중 되었다.
이 논문에서 개성상인들의 성장할 수 있는 배경과 성장과정을 알아보고. 그리고 어려운 위기 즉, 조선시대의 상업을 억제하는 정책에 어떻게 대응하였으며, 또 개항 이후 개성상인들이 차츰 쇠퇴하게 되는 원인과 이유를 생각해보자.
2. 朝鮮初期 개성상인의 성장
朝鮮전기 開城은 도성인 漢陽과 더불어 주요한 商業都市였고, 개성상인 또한 경상과 함께 전국 각지에서 행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개성의 주요 상업도시로서의 위치는 이미 고려시대에 갖추어진 것으로 조선 건국초기 까지 개성은 國內外貿易에 있어 탄탄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건국 이후 漢陽天道가 실시됨에 따라 도성중심의 상권개편이 자연적으로 형성되고 유교적 이념에 따라 강력한 상업통제정책을 실시함에 따라 개성상업은 일시적인 타격을 입었지만 곧 전과 다름없이 回復되었다. 개성상인을 본격적으로 다루기에 앞서 우선 개성상인의 활동의 근원지라 할 수 있는 개성상업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1) 朝鮮初期의 開城商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