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유교의 기본 이해, 역사, 나아가 한국에 미친 영향과 기독교와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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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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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한국유교의 기본 이해, 역사, 나아가 한국에 미친 영향과 기독교와의 비교
목차
I. 서론
1. 유교의 기본이해
2. 한국 유교의 역사
II. 본론
1. 신에 대한 이해
2. 인간에 대한 이해
3. 탄생에 대한 이해
4. 성장에 대한 이해
5. 결혼에 대한 이해
6. 고난에 대한 이해
7. 죽음에 대한 이해
III. 결혼
1. 한국에 미친 유교의 영향
2. 기독교와 비교
3. 기독교의 고찰
※참고문헌
I. 서론
1.유교(儒敎)의 기본이해
‘유교(儒敎)’의 기원을 살펴보면, ‘유’(儒)는 갑골문(甲骨文)이나 주대(周代) 금문(金文)에는 물론『시경(詩經)』,『서경(書經)』에도 쓰이고 있지 않고 있다. 금문이나 시서(詩書)에서는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의미를 갖고 있다. 순자(荀子)에 와서 비로소 유(儒)라는 글자가 쓰이는 예가 많아지는데, 한 대 이후로 유는 공문의 명칭으로 확정되어 제자들 중에서 공자의 가르침을 전승하는 사람들이라는 자각을 뚜렷이 드러내는 대명사가 되었다. 유교가 공자에 의해 개창되었음에도 공자의 이름을 따지 않고 ‘유’(儒) 자를 쓰고 있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도 결국은 이러한 ‘유’(儒)의 세계를 증진 시키는 데에 그 궁극적인 의의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교’란 가르친다는 의미로『논어』의 “유교무류”(儒敎無類)(「위령공 衛靈公」39)에서 드러나듯이 선왕과 공자의 가르침 그 자체를 가리켰다.『맹자』에서는 인륜을 가르치는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유교’(儒敎)라는 용어를 정확히 풀이하자면, 공자가 계승한 선왕들의 가르침으로 문화적 교육을 통해 덕화(德化)를 실현하려는 도덕적, 정치적 사상 체계를 지칭한다. 한 무제(武帝) 때인 기원전 136년에 국교(國敎)가 된 이래 청(淸)나라가 망할 때까지 역대 조정의 지지를 얻으며, 정교일치(政敎一致)의 학문으로 중국의 사회 · 문화 전반을 지배해 왔다. 또한 한자문화권인 한국 · 일본 및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에도 전해져서 큰 영향을 주었다. ‘유교’라는 말은 삼국시대 유 · 불 · 도 삼교(三敎)의 조화를 지칭할 때 사용한 말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2. 한국 유교의 역사
유교가 한국에 전래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시대 때, 당(唐)나라의 학제인 국학(國學)을 받아들인 때를 그 기원으로 삼는다. 즉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에 태학(太學)을 세웠으며, 백제는 국학을 세운 기록은 없으나 285년(고이왕 52)에 이미 왕인(王仁) 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일본에 전한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유학이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에도 오래 전부터 전래된 것 같으나 국학의 건립은 훨씬 늦어 682년(신문왕 2)에야 실시되었다. 그 후 신라에서는 당나라에 유학생을 보내 학문을 장려하고 최치원(崔致遠)은 당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을 떨쳤으며 설총(薛聰)은 이두(吏讀)를 창시하여 구경(九經)을 해석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유교는 유능한 관리를 양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고, 부차적으로는 지도계급으로 하여금 경사(經史)에 통하게 하고 사부(詞賦)와 문장을 능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태조의 숭불정책(崇佛政策)으로 유교가 한때 부진하였다가 992년(성종 11)에 비로소 국자감(國子監)을 세웠고 문종 때는 최충(崔沖)이 9재(齋)를 설치하고 학도를 가르쳤다.
그러나 무관의 발호와 계속된 전란으로 유교는 240년간이나 다시 침체상태에 빠졌다가 제25대 충렬왕 때 안향(安珦)이 왕을 따라 연경(燕京)에 다녀오면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입수해 온 후 정부에 건의하여 국학을 세우고 대성전(大成殿)을 건립하여 공자를 존숭하는 등 유교 부흥에 힘썼다. 그는 또한 한국에 주자학(朱子學:性理學)을 처음 수입하였으므로 주자학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그의 문하에는 백이정(白燎正) · 우탁(禹倬) · 권부(權溥)등이 있어 모두 주자학 부흥에 힘썼으며, 그 학통은 고려 말의 이제현(李齊賢) · 이색(李穡) · 이숭인(李崇仁) · 정몽주(鄭夢周) 등에게로 전승되었다.
특히 그 중에서 정몽주는 성리학에 정통하고 도덕과 경륜(經綸)에도 일가를 이루어 동방 이학(理學)의 조(祖)라 불린다. 조선시대에는 개국 초부터 태조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유교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유교의 기초를 처음으로 확립한 학자는 정도전(鄭道傳)이다.
그는 《불씨잡변(佛氏雜辨)》 등의 논설을 통하여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같은 시대의 유학자 권근(權近)도 많은 저술로 이에 동조하였다. 한편 고려의 유신(儒臣)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종직(金宗直)은 당대의 유종(儒宗)이 되었고, 그의 문인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은 가장 유명하였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로 1498년(연산군 4)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柳子光) 중심의 훈구파(勳舊派)에게 화를 입은 사건이다. 사초(史草)가 발단이 되어 일어난 사화(史禍)로 조선시대 4대사화 가운데 첫 번째 사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