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산兮山 박두진 박두진 생애, 박두진 작품 활동, 박두진 주요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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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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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예언자적 낙관주의자”
혜산(兮山) 박두진
1. 생애 및 작품활동
혜산 박두진(朴斗鎭)은 1916년 경기도 안성군 안성읍 봉남리에서 태어났으며, 9세때 고장치기라는 차령산맥의 한 끝자락에 위치한 한국의 전형적인 시골마을로 이주하여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한 자연속에서 어린시절을 보냈으며 그곳에서의 생활은 그의 시적영감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비교적 유복한 집안에, 아버지는 건강한 쳬격과 인품과 유교적 덕성을 갖춘 자상한 분이었고, 어머니는 섬세하고 능숙한 말솜씨와 함께 풍푸한 어휘력을 갖고 있어 혜산이 시인이 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혜산의 청소년, 청년시절은 이른바 일제 암흑기였다. 일본 제국주의의 잔혹했던 폭정을 몸소 체험하면서 성장한 혜산에게 민족의식이 자라났음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한 상황 속에 혜산이 18세 되던 해, 폭넓은 세계에서 깊이 깨달은 사람을 만나 고민의 해답을 구해야겠다고 결심하여 서울로 올라 왔고, 개인측량 사무실에 취직하여 하숙생활을 하였다. 이 시기에 가졌던 갈등과 고독을 달래주었던 것은 고향에 있는 누님 만순의 편지와 심취했던 문학이었다. 또한 이즈음에 혜산은 기독교에 입문하였다. 이로써 그의 시세계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일관되고 독특하게 통일된 새 경지를 개척하게 되는 큰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20세를 전후, 습작을 시작으로 한때 민요조 서정시나 동시를 발표했던 그는 7,80편의 습작을 거친 후 1939년 《아》(芽)라는 동인지에〈북으로 가는 열차〉를 발표했다. 이 시기 그는 혼자 문장 수업을 하며 당시 시단의 감상적 퇴폐주의, 경박한 외래취향의 모더니즘 시에 거부감을 느끼고 시대적 주의나 조류를 초월하는 영원성 있는 문학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가 자연에서 인간 생명의 근원과 영원성을 찾은 것은 이러한 결과이다. 이러할 즈음에 만났던 《문장》과의 대면은 그의 문학과 인생 전반에 걸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박두진은 당시 정지용이 주간으로 있었던 《문장》에 1939년 6월 〈향현〉,〈묘지송〉이 1회 추천되고, 같은 해에 〈낙엽송〉이 두 번째로 추천, 다음 해 1월 〈의〉,〈들국화〉가 정지용에 의해 추천 완료됨으로써 등단하였다.
이후 혜산은 광복을 맞고, 50년대 동족전쟁, 60년대 4.19혁명, 유신정권 등 역사적 격동기를 거치며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중앙위원, 한국문학가협회 詩분파위원장을 역임하였고, 1956년에는 제 4회 아세아자유문학상을 받았다. 한때 잡지 《학생계》를 주간하였으며, 1976년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수상, 1989년 정지용문학상 수상, 연세대학 서울대학의 문리대 국학대학 이화여대 교수를 역임, 가장 최근엔 연세대학 문리대 교수로 있었다. 60여 년의 시작 생활에서 1000여편이 넘는 작품을 창작하며 활동한 것은 문학적 가치를 제외하고서도 역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문화적 자산임에 틀림없다. 1998년 청록파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혜산은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별세하게 된다.
※ 저 서
『청록집』(1946), 『해』(1949), ///『오도(午禱)』(1953), 시론집 『시와 사랑』(1960), 『거미와 성좌』(1962), 『인간 밀림』(1963), 『하얀 날개』(1967), /// 시론집 『한국현대시론』(1970), 『고산 식물』,『사도행전』,『수석열전』,『속수석열전』(1973) , 시론집 『현대시의 이해와 체험』(1973), 『야생대(野生代)』(1981), 『에레미야의 노래』(1981), 『포옹무한』(1981), 『그래도 해는 뜬다』(1986), 『돌과의 사랑』(1987), 『일어서는 바다』(1987), 『성고독』(1987), 『불사조의 노래』(1987), 『서한체(書翰體)』(1989), 『수벽을 깬다』(1990), 산문전집 『햇살, 햇볕, 햇빛』(1991), 『폭양에 무릎 꿇고』 (1995), 유고시집『당신의 사랑 앞에』 (1999)
2. 혜산의 시적 변모
혜산의 시적 변모과정은 자연(초기)과 인간(중기), 신(후기)으로 대별해 볼 수 있으며, 이 세 관계는 단절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에 놓이기도 한다. 다만, 시기마다 어느 한 특성이 더욱 강하게 나타나는 것뿐이다.
초기시에는 자연에 대한 시적 지향이 나타난다. 혜산이 발견한 자연은 고향을 잃어 버린 민족에게 아름다운 고향을 제시해 준 자연이며 시대적이고 민족적인 것을 비유하는 매재로서의 자연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그는 해와 산과 하늘, 별과 꽃 이라는 영원한 생명이 숨쉬는 자연과 그 안에서 맥박하는 사람들의 정서를 보여주고 때로는 민족적 비극을 종교적 차원으로 승화시켜 새로운 시대에 대한 꾸준한 희망과 기다림을 노래했다. 혜산은 이 시기를 “완전한 암흑기, 고독하고, 처절하고, 암담하던시대”라고 술회한 바 있다. 이 시기의 혜산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신앙적 측면보다는 예술성 자체로서의 성격이 더 드러나는 것이 특징이다.
중기시에서는 6.25의 비극과 4.19혁명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젊은 죽음들의 희생, 그 희생에 가치를 지키려는 열정과 사회악에 대한 비판의식을 강렬하게 표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지상의 삶에 있어서의 고통과 수난에 대한 심리적 갈등과 이에 대응되는 인간 구원에 대한 갈망이 지속적으로 분출되고 있으며, 그의 저항의지가 가장 격렬하고도 밀도 있게 형상화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