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의 이해 주자의 생애와 학문경향 주자 생애 주자 학문 경향 주자 저술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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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문의 이해 주자의 생애와 학문경향 주자 생애 주자 학문 경향 주자 저술활동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주자의 생애와 학문경향
한문학
한문학
목 차
1. 주자의 생애
2. 주자의 학문경향
3. 주자의 저술활동
1. 주자의 생애
주자의 명은 희, 자는 원회 또는 중회이고, 호는 회암, 회옹, 운곡노인, 창주병수, 둔옹 등 이다. 본적은 휘주 무원현 영평향 송암리이나, 출생지는 현 중국의 복건성에 있는 우계현이라고한다. 그의 아버지 위재 주송이 이 성의 관리로 부임한 이유로 그 후 우계현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주자는 남송의 건염 4년인 1130년에 태어났다. 당시 정세는 남송이 성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로, 주자 일가가 몸을 의탁하고 있던 우계에도 왕조 교체의 여파가 미치고 있었다. 주송이 장인에게 보낸 편지는 이 때의 전란의 어려운 상황을 잘 보여준다.
“저는 어머니를 봉양하며 무사히 지내고 있습니다. 소오랑(주자의 어머니)은 9월 15일 정오 남아를 출산했습니다. 염려해 주신 덕분에 모자는 건강합니다. 작년 12월 초부터 건주에서 직무에 임하고 있었습니다만, 오랑캐의 기병이 강서에서 소무로 들어왔다는 비보를 듣고 곧바로 직무를 포기한 채 가족들을 데리고 정화로 가 농사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5월 초순에 공의 반란군이 처주를 불태우고 용천으로 쳐들어왔으므로 배 한 척을 사 서둘러 가족들을 데리고 남검주로 내려가 우계로 갔습니다. 거기에서 저는 가족과 헤어져 단신으로 마차를 몰아 복주로 가서 정장관을 만났습니다.” 이동희, 《주자 동아시아 세계관의 원천》,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7, 32쪽.
한편, 주자는 4세 때 주송이 하늘을 가리키며 “보아라! 저것이 하늘이란다.”라고 하자, 주자는 하늘 위는 무엇이냐고 되물어 아버지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왕무횡,
이를 통해 어릴 때부터 우주에 대해 근본적으로 물어보았다는 점으로부터 우리는 혁신적이고 체계적인 그의 사상가적 면모를 볼 수 있다. 이동희, 《주자 동아시아 세계관의 원천》,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7, 33쪽.
5세에 소학에 입학하였고, 소흥 10년(1140) 주자 11세 때 아버지 주송은 진회가 주장한 화의에 반대함으로써 정계에서 추방당하여 건안의 환계정사에 은거하게 되었고, 주자는 가족들을 따라 그 곳에 가서 살게 되었다. 이 해 그는 선생에게서 《효경》을 받아 일독한 후 나무 위에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쓰기도 했다. 이동희, 《주자 동아시아 세계관의 원천》,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7, 35쪽.
소흥 13년(1143) 부친이 사망하고, 주자는 18세 가을 건주에서 실시된 해시에 합격하여 수도에서 실시되는 본 시험의 응시자격을 얻었고, 이듬해 봄 수도 임안에서 시행된 본 시험에 합격하여 그 해 여름 동진사 출신의 자격을 얻었다. 당시 주자의 성적은 제5갑 제90인(330명 중 278번 째)으로 그다지 우수한 성적은 아니었지만, 당시 합격자의 평균연령으로는 어린 나이에 합격한 것으로 보인다.
주자는 24세 7월부터 4년간 오늘날 대만의 금문도와 마주보고 있는 천주 동안현의 주부라는 말단 관직을 받아 부임하게 된다. 이 기간 중 그는 조세장부를 매일 점검하고, 관리의 부정을 막고 공평한 조세정책을 행하고, 또 관리, 부호 상인들이 그들의 재력을 바탕으로 농민의 전답을 되사는 방식으로 경작권을 침탈하는 행위 등을 잘 처리하였다. 또 도서관을 건립하고, 혼인법을 제정하여 민풍을 진작시키고, 사격장을 만들어 민병을 훈련시키고, 토비를 막는 등 관리로서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주자는 28세에 동안현을 떠난 이후 50세의 나이로 남강군 지사로 외직에 나가기까지 약 20년간 실제로 관직에 오르지 않고 오로지 집에서 독서와 저술과 제자 교육에 힘썼다. 그의 주된 저서들은 이때에 쓰여졌다. 생활의 방편은 사록관으로서 받는 적은 액수의 봉급과 문하생의 사례였다.